“신학의 결과, 지식 아닌 예수 사랑으로 나타나야”

목회·신학
신학
최승연 기자
press@cdaily.co.kr
  •   
개혁주의생명신학회·한국개혁신학회, 공동 학술대회 개최
개혁주의생명신학회가 한국개혁신학회와 서울 서초구 백석대학교 대학원 백석아트홀에서 ‘신학회복운동’이라는 주제로 제58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제공

개혁주의생명신학회(회장 이춘길 박사)가 한국개혁신학회와 함께 19일 서울 서초구 백석대학교 대학원 백석아트홀에서 ‘신학회복운동’이라는 주제로 제58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 장종현 목사(예장 백석 대표총회장)가 ‘신학은 왜 학문이 아닙니까?’(요한복음 17:3)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장 목사는 “신학이 사변화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신학의 본질은 성경을 기준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 본질에 벗어나 학문화된 것이 사변화된 것이다. 신학자들 가운데 자신이 사변화된 것을 배워 왔으면서도 자신의 신학이 사변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신학의 사변화는 성경 66권을 인간이 쓴 책이라고 여기고 연구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신학은 사변화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분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다. 신학의 결과는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인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학 공부를 많이 할수록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더욱 겸손하고 순종하고 섬겨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순종의 고백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학 공부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다.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진 기조강연에서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가 ‘카이퍼의 영역주권론과 반립 사상’, 주도홍 박사(신학은학문이아니다연구소 소장)가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헤페와 바빙크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강연했다.

카이퍼의 영역주권론과 반립 사상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가 ‘카이퍼의 영역주권론과 반립 사상’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제공

김영한 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신학자, 교육가이자 네덜란드의 수상을 역임한 정치가이다. 카이퍼는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미국의 벤저민 워필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주장한 일반은총과 하나님의 영역 주권사상은 후대 개혁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1880년에 카이퍼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을 설립하고 ‘삶의 각 영역에 있어서의 주권’이라는 제목의 개회 연설에서 영역 주권 사상을 제창하였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다.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흐룬 판 프린스터러로부터 배워서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카이퍼는 삶의 각 영역이 고유한 주권을 그리스도께 직접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프랑스혁명 정신과 맞서 반혁명당을 이끌었고, 국가 권력과 이 권력에 아부하는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독립한 자유대학교를 세웠다. 기독교 대학의 이념이란 왕이신 그리스도의 절대 주권 아래 모든 독립적 영역 주권을 복종시키는 영역 주권 사상”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1861년 카이퍼는 19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충격을 주었던 노(老)정객 흐룬 판 프린스터러(Groen Van Prinstere, 1801-1876)를 만난다. 이 만남은 카이퍼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판 프린스터러는 그의 저서 『불신앙과 혁명』에서 19세기 유럽문명의 위기는 자유주의의 불신앙에서 온 것이며 그 대안은 하나님 말씀을 역사와 인생에 비추어보는 기독교 세계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며 “카이퍼는 판 프린스터러의 사상을 이어받아 반립 사상을 신학적으로 세련화시켰다. 카이퍼는 18세기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 전통과 정면으로 상충된다고 보고, 자신의 입장을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한 ‘반혁명적 복음주의’(anti-revolutionaty evangelicalism)라고 천명했다”고 했다.

이어 “카이퍼는 자신이 수상으로 재직하던 1904년 3월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모더니즘을 초래한 ‘반립’의 실체를 이렇게 표명한다: 기독교세계관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인위적인 세계관과는 특징적으로 정반대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립이 지속적으로 학문의 모든 분야로 확장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립 사상은 하나님의 왕국과 어두움의 왕국사이에 투쟁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반립사상이란 근대이후 병적으로 허덕이는 유럽정신의 반영으로서의 예술 현상을 분석, 서술하여, 이런 진단을 통해서 그 처방을 찾는데 목적이 있다. 그 처방이란 상실한 중심을 회복하는 일, 신과의 관계를 되찾는 일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세상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한다(고후 10:6)”고 했다.

김 박사는 “카이퍼는 ‘제2의 칼빈’이라 불렸고, 1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졌다고 할 정도로 목회자, 신학자, 정치가, 사회개혁자, 저널리스트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높이는데 전 생애를 헌신했다. 그는 일반은총 개념을 확장하여 교회차원에 머문 좁은 칼빈주의를 현실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는 신칼빈주의(neo-calvinism)를 제창하였다. 이러한 일반은총 사상 때문에 칼빈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포괄적 사상체계요 세계관으로서 단지 예정론을 믿는 협소한 신학체계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개혁교회와 신학은 현대세속문화에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문화마르크시즘, 젠더주의 세계관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증언하는 문화변혁의 일을 다하여야 한다. 카이퍼의 영역주권론과 반립사상은 우리들에게 이론과 전략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동성애 차별금지법, 정교분리 이슈로 갈등 속에 있는 한국교회와 사회에 동성애 차별금지법 및 각종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 및 문화마르크스주의에 대립하여 성경과 성령의 능력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사회의 기본 질서의 원리를 제시하는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고 했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헤페와 바빙크를 중심으로

학술대회 토론회가 진행되고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제공

주도홍 박사는 “헤페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로의 초대는 신앙으로, 바른 신학은 성령이 거듭난 사람에게 주는 은사 곧 선한 이성이 도구이다. 타락한 이성은 초자연적 진리에 눈이 멀었다. 성령의 조명으로 인한 건강한 이성은 높은 곳에 있는 신앙의 신비에 이를 수 있다. 헤페에게 있어 신앙은 이성을 파괴하지 않고, 밝은 빛을 비춰준다. 바른 신학에서 이성은 도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함께 할 때만 유효하다. 여기에 계시신학이 형성된다. 이 계시신학은 결국 총체적 인간의 삶을 변화로 이끈다. 신학자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자이다. 신학은 단순한 깨달음,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총체적 삶을 바꾸는 거룩한 삶이다”고 했다.

그는 “바빙크의 신학의 전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변화된 인간이다. 신학은 인간의 모순과 그 실체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바빙크에게 있어 학문은 인간의 위대성에 관심을 갖기에, 비참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곧 학문은 인간의 심각한 타락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성경은 이 둘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신앙의 명료성은 (신학적) 학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신학을 추구했다. 결과 호기심어린 탐구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다. 신학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 아래 공부하고, 그 모든 내용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시중든다. 그렇지만, 신학의 교만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뛰어넘어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주 박사는 “우리 안에 이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성을 결코 미워하지 않으시는데, 그 이성이 믿음 안에 있을 때다. 신앙을 포기하자마자, 신학은 존재를 멈춘다. 이성은 하나님의 존재 신비에 맞닥뜨리면 인식하는 일을 멈춘다. 하나님의 신비는 이성을 거부하기보다는 이성을 초월해 있기에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신앙은 경이로 변하고, 지식은 예배로 끝이 나고, 그들의 고백은 찬양과 감사의 노래가 된다. 이는 곧 신학이 가는 목적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생이다(요17;3).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교회를 진리로 인도하는 교회의 교사다”고 했다.

이어 “20세기 벌코프는 신학자들이 신학에 학문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떠나 종교적 경험, 종교적 신앙, 종교일반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신학과 종교학의 차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벌코프는 과학적 방법론을 떠나 ‘절대학문’인 신학 고유의 ‘신앙적 방법론’을 가져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같은 맥락에서 21세기 오늘 맥그래스는‘기독교적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기독교 신학을 제시한다. 이렇듯 벌코프와 맥그래스는 일반 학문과 신학의 분리 내지는 차이를 분명히 인식한다. 맥그래스에게 신앙은 이성을 반대하지 않지만, 다만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성령이 선생이신 기독교 진리는 이성 너머에 있지만, 비합리적이거나 맹목적이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17세기 영국 청교도이며 개혁신학자인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의 말은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교리 또는 삶의 가르침으로 정의하며, 신학의 본질이야말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해 사는 삶이라고 정의했다. 다르게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며, 그것을 위해 탐구하여 글을 쓰고 말하는 자라 하겠다. 삶이 분리되거나 삶이 없는 신학 연구는 그야말로 사변적이라 할 것이다. 진정한 신학은 그러기에 학문 신학을 떠나, 삶이 있는 생명신학이어야 하겠다”고 했다.

주 박사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또는 가르침이다. 모든 학문은 자신들의 규범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자들의 작업은 이에 상응해야 한다. 산다는 것이 모든 것 중 가장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사는 것에 대한 학문보다 더 적절한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종류의 삶은 살아계시며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므로 신학적 삶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이라며 “신학의 이해를 종합하면, 학문을 업신여기지 않으나, 신학은 인간 이성에 권위를 부여하는 과학이나 학문이 아니고, 신앙과 계시, 성령의 조명을 받는 신앙 안에 있는 거듭난 이성을 도구로 행해지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신학은 학문이 아니고, 거룩한 찬양과 예배가 함께하는 삶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그는 “신학은 겸손으로 허리띠를 매고 자신을 성찰하며 역사를 기억하고 서로 사랑하고 거룩한 삶으로 본인에게 주어진 과업을 작게나마 신실하게 이루어야 할 것이다. 신학은 거룩한 삶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기조강연 이후 발표회 및 토론회가 진행됐다.

#개혁주의생명신학회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