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4) “하나님을 보았느니라”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4:7-14
이희우 목사

모세의 주도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등장은 하나님 입장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사실 날이 갈수록 점점 하나님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성육신과 3대 사역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질 것을 아셨을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마치 인류가 갖게 될 의문을 미리 예상하신 것처럼 이런 해답을 제시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 이 말씀과 9절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9절)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계시였다.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있다면 나를 주목하라. 나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풀라”라는 뜻, 예수님은 당신이 곧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계신다.

보여달라는 요청에 대한 응답

예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6:5)하고 물으셨을 때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던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빌립은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한다(8절). 영이신 하나님을 감각적으로 보기를 원한 것, 이게 ‘우리의 소원’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소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뵙기만 한다면 어떤 문제든 해결된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든 이런 소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빌립의 이 요청을 1500여년 전 이미 모세도 한 적 있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달라고 소원을 말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보여주기는 하셨지만 등짝만 살짝 보여주셨다”(출33:20-23).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은 보면 죽는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자기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는 말씀에 빌립이 차라리 하나님 한 번 뵙고 죽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다. 레온모리스(Leon Morris)는 이런 요구는 아직 예수님을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면 죽는다거나 그건 곤란하다거나 언젠가 그럴 날 올 온다고 하시지 않고 ‘이미 보았다’고 대답하신다(9절). 그러면서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특별히 친근한 관계’라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관계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들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말씀,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였다.

예수님은 당신이 성부 하나님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하나님을 뵌 것이라고 하신다. 그것도 등만 살짝 뵌 게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하며 뵌 것,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계시되셨다는 말씀이다. 구청장 취임 축하예배 설교를 마치고 식사하러 가는 길에 어떤 국장이 아주 밝은 표정으로 “목사님, 저 기억 못하시죠?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셔서 “어떻게요?” 그랬더니 “제가 2대 전 구청장 비서실장이었기에 그때 목사님이 구청장 만나 기도해주실 때마다 뵈었습니다” 그러셔서 조금은 미안했다. 빌립이나 제자들도 지금 그런 모양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뵙고도 뵙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꼴이다. 왜 그럴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안다’라는 말이 중요하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원래 좀 다른데 요한복음에서 ‘아는 것’은 곧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깨달은 자, 아는 자가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1장에서도 이미 본 것으로 증언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1;14), 하나님의 영광을 봤다고 한 요한은 요한서신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2), 확실히 봤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엄연히 함께 계시는 분을 한 번도 못 뵌 분 취급하지 말고 요한처럼 눈으로 뵌 분, 손으로 만진 분으로 알고 친근하게 대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아는 정도와 직접 만나 뵙는 영광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못 보는 이유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렸던 글인데 한 여성이 목사님을 찾아가 자기의 근심 걱정을 다 털어놓는다. 남편으로부터 시작해 아이들에 관한 것, 가정사에 관한 것, 직장에 관한 것, 개인적이고 소소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내다 보니 한 시간 정도 흘렀다. 목사님이 “이제 그만합시다. 그리고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혹시 이 모든 일들로 인해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해 보기는 하셨나요? 아니 하나님은 아세요?” 그러자 이 여성이 “저도 하나 좀 물어봅시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세요?” 물었다. 목사님의 대답이다. “No, I don’t. But I am surprised by God in every moment”(나는 모든 순간 하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그저 놀라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에는 논리적 지식, 감성적 지식, 경험적 지식, 그리고 감각적 지식이 있는데 논리적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만물의 근원을 보이지 않는 힘, 에너지(Energy)라며 그 힘이 물질이냐 인격이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맑은 이성이라면 그 능력과 기능을 따라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감성적 지식은 가슴으로 아는 거다. 보통 엄마들은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울어도 왜 우는지를 안다. 감성적으로 아는 것, 마음으로 아는 거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면 가슴이 열리지만 미워하면 가슴이 닫히고, 의심하면 지식이 굴절해서 오해가 생긴다. 딴소리 말라. 하나님도 사랑하면 뵐 수 있다.

그리고 경험적 지식은 몸으로 부딪히면서 경험 속에서 얻는 지식이다. 물론 경험 자체만으로 지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경험이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래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고장 난 인간 심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약 중독자들이 죽든 살든 주사 한 대만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식의 하루살이 같은 심리 상태, 또 “될 대로 되라”는 운명적 심리 태도, 이런 게 고장 난 인간 심리인데 한 마디로 곤란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존심을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했다. 맞다. 고장 난 심리 상태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가 하면 감각적 지식이 있다. 요즘 ‘뭉쳐야 찬다’는 프로와 ‘골 때리는 그녀들’이란 TV프로가 있는데 꽤 재미가 있다. 축구선수들도 아닌데 그냥 열심히 뛰는 게 아니라 감각이 있다. 그래서 날로 발전하는데 지식에도 감각적 지식이 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다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뵈었어야 한다는 것, 감각적으로 느낌이 오고, 경험적으로 깨달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수술 중인 외과의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중해야 한다는 거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박사는 “성공에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집중력이다. 성공하는 리더는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하며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한다”고 했다. 집중을 강조한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할 때 집에서 키우는 개가 자기를 쳐다보는데 빵을 집으면 빵을 보고 고기를 집으면 고기를 보고 손이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완전 시선을 고정하는 모습을 보고, “이 개가 고기 조각을 쳐다보는 것 같이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어야 하는데...” 집중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 혹시 기도할 때 “하나님” 또는 “아버지” 불러놓고 생각이 너무 복잡하지 않니? 집중이 안 되는 거다. 안 된다. 생각이 복잡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폴로 15호로 달나라를 다녀온 제임스 어윈(James Benson Irwin) 예비역 대령은 달나라에서 본 지구가 총천연색, 너무 아름다웠다며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감탄하며 찬송했다고 간증했다. 그런데 구 소련에 가서 강연할 때 그 얘기를 들은 한 공산주의자가 “우리나라 우주인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인가?” 묻자 어윈 대령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단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본다.

묻는다. 하나님을 보면서 사나?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중요한 말씀이다. 만일 아직도 못 뵌 것 같다면 경험은 있으되 이해가 부족한 것,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불충분해서도 아니고,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하고 의심하고 욕심 품고 잘못된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했다(11절). 그러면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3-14절)고 하셨다. 이름만 대면 다 이루어 주신다는 뜻은 아니지만 응답 약속이다. 독일 속담에 “당신이 기도하기 위해 손을 모으면,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기 위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기도는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모자라는 것을 채우게 하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기도는 사업이요, 사역이다.

신원 에벤에셀은 1997년 IMF 때 부도난 회사였다. 하지만 회장 박성철 장로께서 일천 번제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기적 같이 회복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도 담요 뒤집어쓰고 새벽기도에 나와 3년을 부르짖었더니 회복을 주시더라는 것, 기억하라. 기도하면 응답 있다.

그런데 혹시 응답이 없다면 신앙에서 출발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정말 예수님의 소원에 집중하면 하나님도 우리 소원에 집중하신다. 예수님의 소원은 단 두 가지, 영혼 구원과 제자 양육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소원 성취를 위해 살면 기도와 말씀이 엄청난 무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 다얀(Moshe Dayan) 장군은 100배의 인구를 가진 아랍 연합군과 맞서 싸우는 전쟁 때 승리로 이끌 무기가 있다고 선언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몰래 숨겨둔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능가하는 신무기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다얀 장군이 공개한 신무기는 바로 시 121편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역시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13-14절 말씀은 그저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말씀 안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됨이 강조되고 있다. ‘내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과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10절에서도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랬다. ‘안에 거하고’는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은 하나님과의 하나 됨에서 나온다는 것, 성경은 줄곧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뜻이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하는 대로 된 것,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한다. 기도가 자연도 순복하는 능력, 끝없는 무한대의 능력임을 드러내야 한다.

기도의 대가 조지 뮬러(George Muller)는 평생 5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 비결 중 하나는 그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다. 죠지 뮬러는 “가장 중요한 점은 응답이 올 때까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회심을 위해 63년 8개월 간 기도했다.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나는 변함없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다.” 뮬러가 죽을 때까지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죠지 뮬러의 믿음대로 그 사람이 결국 회심했다. 그것도 바로 죠지 뮬러의 장례식장에서였다.

뮬러는 2천여 명 고아를 먹인 고아의 아버지였고, 300만 권의 성경을 보급했던 선교사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뮬러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가 끝날 무렵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차 한 대가 다가와 고아원 문을 두드렸다.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 실린 마차였다. 폭우로 인근 공장 종업원 야유회가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평생 단 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공급받은 돈은 무려 30억 원 이상, 지금의 화폐가치로는 30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죠지 뮬러의 기도 응답의 비결 중 또 다른 하나는 성경에 근거한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200독 한 뮬러,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기도 내용을 점검하고 응답을 확인했다. 그래서 늘 응답받는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이다. 이거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하나님과의 하나됨, 우리는 이 하나됨에 힘써야 한다. 절대 주문처럼 ‘예수 이름으로’ 그러지 말고,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되기만 한다면 무엇을 구하든지 반드시 응답받을 것을 확신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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