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목회자의 롤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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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 박사

하나님은 시대가 어두워지면 그의 의에 가장 합당한 인물을 들어 인간정신 및 사회를 정화해 오셨다. 근대를 포함한 20세기에는 세 인물들이 그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첫째로 존 웨슬리(1703-1791)다. 그가 활동하기 시작하던 때 영국의 생활상은 아주 비관적이었다. 거리마다 술집, 그러다 보니 주정뱅이들이 많았다. 창녀들도 많았고, 성질서도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형편 없었다. 소설이나 그림들은 선정적이었고, 운동은 난폭하기 그지없는 것들로 행해졌다.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으며, 돈을 벌기 위한 노예 매매도 심했다. 수 십만 명의 흑인들을 노예로 미국에 팔기도 했다. 참으로 어두웠던 때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이때 하나님이 존 웨슬리를 택하여 들어 쓰셨다. 전도집회의 설교로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성령운동으로 영적 거룩함을 회복하게 하셨다. 웨슬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즐겨 설교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그의 산상수훈 설교는 영혼에 호소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쳤고, 사회봉사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도 활발히 했다. 웨슬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갑을 여는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챤이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영적 운동과 더불어 삶의 현실적인 문제도 심도있게 다루었다. 여기에 따른 그의 학문적 논리도 만들어졌다. 감리교의 핵심 교리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든가 “성결론” 같은 것이다. 그의 구원론, 즉 신인협동설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 방법에 대한 학문적 이론을 세우기도 한 대신학자였다. 이론과 실천의 균형잡힌 활동의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결국,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통한 성결운동은 영국사회를 변화시켰다. 사람마다 경건한 삶을 살고자 결심하였고, 또한 경건으로 말미암아 교회예배가 회복되었다. 사회질서도 다시 회복되어 영국은 바람직한 영육간의 신사의 생활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인간은 법이나, 교육, 기타 그 무엇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다. 오로지 영혼이 변화되어야 변화된 인간이 될 수 있다” 하여 영적 변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와 같은 성령운동으로 영국을 변화시킨 인물이다.

칼 바르트 역시 목회와 학문, 이론과 실천의 균형잡힌 모범을 보여 준 인물이다. 바르트(1886-1968)는 스위스의 개혁교회 목사였다.

그는 베른대학교와 튀빙겐대학교에서 학업을 했다. 매우 학구적인 면모를 가졌으나 목회도 하였다. 그는 스위스 공업지대였던 탄광촌 자팬빌에서 12년 동안 노동자들 중심으로 목회하였다. 특히,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로부터 억압이나 착취를 당하는 현실을 보며 노동자들의 비참함에 동정심을 갖게 되어 그들의 힘겨운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정신으로 목회하였다. 그러한 목회자로서의 태도에 대해 자본가들은 그를 “빨갱이 목사(Red Pastor)”라 낙인 찍어 불렀다. 그는 다만 가난한 자, 멸시 천대 받는 자, 인간대우 받지 못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적 설교와 목회를 했을 뿐인데,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이나 이권 유지에 관심을 가져 바르트를 빨갱이 목사로 덮어씌워 그렇게 부른 것이다. 바르트는 정말 빨갱이 목사였는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보여 주셨던 설교 그대로를 설교하고, 이를 바탕으로 목회했을 뿐이다.

21세기, 아직도 약하고, 부족하고, 힘없는가난한 자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좌파 목사”라는 딱지를 거침없이 갖다 붙이는 이념적 속성이 있다. 알다시피, 한국 사회는 좌우파 양극화(Binary Opposition) 현상이 심화되어 갈라져 있다. 정권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력 없는 무지의 소치다. 진짜 빨갱이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따르는 자들로 따로 있는 것 이닌가. 마르크스나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이 많아 불가피하게 목사들이 이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이 사실이긴 하지만, 좌파라고 다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목사들은 좌우파나 이념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

12년 동안 이런 말을 들으며 목회하면서 여기서 바르트는 인간의 죄성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죄의 성품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신학적으로 이론을 세워 나갔다. 그것이 바르트의 신학적 변증법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을 강조했고, 신정통주의자로서 복음주의신학 이론을 다시 회복하여 21세기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기독교 교회와 연관하여 볼 때, 목회와 신학의 조화를 잘 이룬 목사였다.

신학자 목회, 그리고 이론과 실천에서 바르트와 같은 조화를 이룬 목사로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가 있다.

그는 미국 미주리 주 엠허스트에서 성장하고, 뉴헤이븐의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목사가 된 후 1915년 디트로이트 복음교회를 담임하여 13년 동안 목회하였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 공업단지로서 미 전역에서 노동자, 사무원, 사업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도시가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니버가 목회하던 교회에는 포드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이나 사무 직원들이 많이 출석했다. 목회하면서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의 갈등이나 문제점들을 보게 되었다. 인간은 약자를 도우려는 본심이 있어 니버 역시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경영자들의 탐욕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포드 회장과 면담도 하는 것으로 목회자가 약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니버는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지만,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위해 니버를 배신하는 일들을 많이 하였고, 교회를 떠나가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인간의 본심을 파악하게 되었는데, 결국 인간은 죄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목회하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느끼게 되었고, 그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불후의 책들을 쓰게 되었다. 1913년 처음 개척할 때는 60여명 정도였으나, 그가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가기 위해 이임할 때는 700여명 정도로 목회도 훌륭하게 해냈다. 1928년, 13년 동안의 목회를 끝내고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때, 거기서 그는 목회경험을 중심으로 명강의를 하게 된다. 미국내 정치권 인물들의 상담 요청이 수시로 따랐고, 영국에서 조차 강연 연사로 초청하여 수 차례 영국을 가기도 할 정도로 휼륭한 신학자의 삶을 살았다. 웨슬리나 바르트처럼 목회와 신학 두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위 세 인물들을 통해 신학과 목회는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위 세 인물들이 이를 훌륭하게 이행한 목회자요 신학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이와 같이 신학적 학문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고, 목회도 충실히 감당하는 그런 능력을 겸비한 목회자, 신학자가 되어야 겠다. 책상에서 하는 신학은 현실성과 진실성이 없다. 위 세 인물들이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추구해야 할 오늘날 목회자들의 롤모델임을 기억해야 한다.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