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식물 헌재’ 곧 ‘법치주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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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헌재)가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오는 17일 세 명의 헌법재판관이 퇴임하게 되는데 국회가 아직까지 후임 재판관을 추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라면 의결정족수 미달로 헌재의 기능이 ‘올 스톱’될 수밖에 없다.

국회 추천 몫의 헌법재판관인 이종석 헌재소장과 이영진·김기영 재판관은 모두 오는 17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때 같았으면 이미 국회에서 후임 후보 추천이 끝나야 하는데 단 한 명도 추천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야의 생각이 달라서다. 국민의 힘은 관례대로 여야가 한 명씩 추천하고, 나머지 한 명을 합의로 정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의석수에 비례해 야당이 2명을 추천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어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헌법재판소법은 재판관 7명 이상이 출석해야 사건을 심리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3명의 재판관이 퇴임하고 나면 6명만 남게 돼 규정상 그 어떤 심리도 진행할 수 없다. 사실상 ‘식물 헌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헌재 마비 사태가 눈앞에 닥치자 국회에서 탄핵이 소추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헌법소원을 냈다. 3명의 재판관 퇴임에 따른 ‘헌법재판관 공백’에 대한 자위권 차원이랄 수 있다. 18일부터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심판 심리가 멈추게 되면 직무 정지 기간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는 게 부당하다는 취지다.

이 위원장은 또 재판관 정족수를 규정한 헌법재판소법 제23조 1항 조항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도 냈다. 헌재가 가처분을 받아들이면 해당 조항의 효력은 본안 사건의 결정 선고 시까지 임시로 멈추고, 정족수 제한이 없어지면서 남은 재판관들만으로도 사건 심리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헌재가 지난 14일 이 위원장이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23조 1항의 효력이 임시로 멈추게 됐다. 정족수 제한이 없어지기 때문에 후임 재판관 3명이 임명되지 않더라도 이 위원장 탄핵 심판을 게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심리 사건도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계는 헌재 마비 사태가 자칫 교계가 주목하는 위헌 심판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해 왔다. 지금 헌재엔 코로나19 확산 당시 교회 등 종교시설에서 대면 예배를 금지한 감염병예방법의 조항에 대한 위헌 제청 심판이 신청돼 있어서다. 교계는 팬데믹 당시 여러 교회가 대면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어 헌재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시하고 있다.

이 위헌 제청 심판은 지난 9월 10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1단독 이상엽 판사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감염병예방법)상 ‘집회’ 중 ‘종교집회’에 대한 제한 및 금지 조치가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가려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직권으로 심판을 제청했다는데 중요한 방점이 있다.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법원이 위헌 여부를 헌재에 판단해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사안이 그만큼 위중하다는 뜻이다.

감염병예방법은 보건복지부장관,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이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종교집회’를 포함한 각종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게 목적이다. 문제는 이 법률 규정이 헌법상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를 억압해 그 사이에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한 점이다.

이번 사건은 경기도 고양시의 한 교회 목사가 2020년 8월 23일, 약 50명의 성도들과 함께 대면 예배를 진행한 혐의로 고발돼 기소된 게 발단이다. 당시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 중이던 시기여서 고양시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대면 예배를 포함한 집합 제한 및 금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해당 교회와 목사는 2020년 9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대면 예배를 지속했다. 이에 대한 재판이 ‘감염병예방법’과 ‘종교의 자유’ 사이의 균형에 대한 법적 논의를 촉발시키면서 담당 판사가 헌재에 직권 심판 제청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됐다.

이런 중요한 심판을 앞둔 헌재가 재판관 정족수 미달로 모든 위헌 심판의 마비 사태를 부르게 된 건 이유와 책임 소재를 떠나 ‘법치주의’의 심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피해는 헌법상 불이익을 구제받을 수 없게 되는 국민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절박성 속에서 헌재가 이 위원장이 낸 가처분을 받아들여 위헌 심리를 계속할 수 있게 된 건 불행 중 다행이다.

헌재 마비 사태가 초래된 데 대해 정치권에선 야당이 헌재 무력화를 통해 야당 단독으로 탄핵 절차 완성을 노린다는 음모론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헌재가 무력화되면 야당이 국회에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권을 발동할 수 있게 되고 그건 곧바로 헌정 마비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거대 야당이 마음먹기에 따라 민주주의의 3축인 삼권분립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입법기관이 헌법기관을 마비시킨다면 그건 공들여 세운 ‘법치주의’를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행위다. 시간을 끌수록 국민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지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손실은 시간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헌재의 가처분 인용으로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완전 정상화까지는 아직 멀었다. 여야가 목전의 정파적 이익에서 한 발짝씩 물러나 하루속히 헌재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데 모든 힘을 쏟는 것이 위기에 처한 ‘법치주의’를 다시 살리고 국민에 대한 신의와 도리를 회복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