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3)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14:1-6
이희우 목사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에 대경실색(大驚失色)했을 것이다. 큰 시험이 닥칠 것이라는 말씀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곧 떠난다 하시고, 그곳을 제자들은 따라올 수 없는 곳이라 하신다. 예수님 따르기에 올인한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말씀,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가 다 평정심을 잃었다. 몇 시간 후면 제자들이 더 불안해 할 것을 아신 예수님은 믿음으로 재무장하고 침착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절), 근심할 필요가 없다, 겁먹지 말라는 말씀이다. 근심 걱정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마음에 근신하지 말라”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은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믿고, 동시에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믿으라고 하신다. 쉬운 일인가? 하나님은 믿는다 해도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곧 한 제자에게 배반당할 예수, 맏형이자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3번이나 부인당하고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고 혼자 쓸쓸히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요한은 3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분’으로 소개하고, 그 후 줄곧 그 독생자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자 생명 그 자체라고 소개한다. 바울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구원의 주로 소개한다.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구뿐 아니라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초월자요 전능자이시다. 천문학의 설명을 보면 태양의 지름은 약 139만km로 지구 지름의 109배다. 엄청 크다. 태양의 부피도 지구의 130만 배다. 그런데 선명하고 아름답고 붉은 별 안타레스(Antares)는 지름이 태양의 700~883배이고, 베텔게우스(Betelgeuse)라는 별은 반지름이 태양의 955배라 한다. 그렇다고 제일 크냐? 아니다. 더 거대한 별도 있다고 한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에는 2,000억 개의 별이 있고, 또 우주에는 이런 은하계가 1,000억 개 이상 있다고 한다. 우주의 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지금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구의 자전 속도를 시속 1,660km로 정하셨다. 1초에 463m로 돌고 있는데 이 속도가 조금만 줄어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만 해도 몸이 떨린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가 너무도 적당한 거다. 태양 표면 온도가 섭씨 6,000도, 지구상의 모든 물질 철, 구리, 돌, 나무가 다 증발할 온도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온도, 그래서 지금보다 거리가 조금만 가깝거나 멀어지면 금성이나 화성처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구의 축을 23.5도 기울여 놓은 것도 기가 막히다. 만일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4계절도 없고 지금의 인류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온 대륙이 다 얼음덩어리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1년 내내 추위를 피해 적도 부근에 모여 살았을 것이다.

동식물을 공존케 하신 것도 놀랍다. 신체적 성장을 적당한 선에서 제한해 놓은 것도 감사하다. 쥐가 사람보다 크다면 어땠을까? 곤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폐 없이 관으로 호흡케 하셔서 일정 크기 이상의 성장을 막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인류의 범죄로 자연의 조화가 깨어지고 인간에게 온갖 어려움이 찾아왔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셨다. 그게 바로 십자가다. 문제는 십자가가 엄청난 고난이었다는 것, 죽음의 공포로 제자들이 다 부인하고 도망치는 엄청난 사건, 그래서 평정심을 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다.

믿음이 뭔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마음과 생활 속에 영접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요1:12-13). 영접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요한일서에서는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5:11-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으면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끔찍한 죽음이 닥치더라도 근심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거처를 예비하러 가니

성경은 십자가를 영광이라 한다. 제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각했지만 아니다. 당신이 빨리 죽어 저 세상에 가야 그곳에 아버지의 집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신다. 지금이 바로 모든 성도들이 죽어서 갈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순간, 그러니 “근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곳을 ‘아버지 집’이라고 하셨다(2절). 그리고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다. 영어번역본인 새 국제판 성경(NIV)은 ‘거할 곳’을 ‘many rooms’라 했지만 킹제임스버전(KJV)은 ‘맨션(mansions)’이라 번역했다. 헬라어로 ‘모나이’(μοναὶ), ‘영구한 거주지’라는 단어이다. 박윤선 주석에 의하면 “그 곳은 전부터 아버지 집에 있어 온 것,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처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늘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주님이 예비하신다는 ‘거처’는 본래부터 있던 아버지 집의 성도들을 수용할 자리이고, 예비하신다는 것은 성도들이 갈 수 있도록 수속을 이행하신다는 뜻”이라 했다. 그 수속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시는 거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근본을 잊지 않고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마음,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마음이다.

탐 존스(Tom Jones)의 “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감미로운 노래가 있다. 조영남 씨가 “고향의 푸른 잔디”라고 불렀던 번안곡, “꿈속에 그려보는/ 머나먼 고향아/ 옛 모습 변치않고/ 지금도 잘 있느냐/ 사랑하는 부모 형제/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야/ 타향살이 서러워도/ 꿈속에 그려보는 고향/ 푸르고 푸른 고향의 잔디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원적인 노래, 마치 시편 23편의 푸른 초장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사실 사형수의 노래였다. 원곡 3절 가사를 보면 “순간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사방을 둘러싼 회색 벽뿐/ 나는 단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교도관과 슬퍼하는 늙은 신부가 있었다/ 팔짱을 끼고 우리는 새벽길을 걸을 것이다/ 나는 다시 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게 되겠지”

이 사형수에게 고향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 꿈속에서라도 가고 싶은 곳일 뿐이다. 이게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을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니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은 자신의 책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더 빨리 달리려고만 한다”며 “멈춰 서서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인생의 목표인 길을 잃은 현대인,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방향”인데 방향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른 채 질주만 하고 있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이 길만이 아니다. 인생의 중심인 진리도 잃었고, 인생의 에너지인 생명도 잃었다. 진리는 밝은 등불과 같은 것, 길이 있어도 어둠 속을 질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길이 있고, 빛이 있어도 생명이 없다면 길도 진리도 소용없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기름이 있어야 움직이듯 사람도 생명이 있어야 움직인다.

그런데 예수님이 엄청난 선언을 하신다. 천국에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하시던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6장), “나는 세상의 빛”(8장). “나는 양의 문, 선한 목자”(10장), “나는 부활이요 생명”(11장) 5번의 I am...sayings에 이어 6번째 자기 선언을 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절), 엄청난 선언이다. 영어로 보면 더 엄청나다.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여럿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는 선언이다. 14세기 신비주의 수도사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고전을 썼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는 이 선언을 “길 없이는 갈 수 없고, 진리 없이는 알 수 없으며, 생명 없이는 살 수 없는데, 나는 너희가 따라야 할 길이고, 너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너희가 바라야 할 생명이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길이고, 잘못될 수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 나는 가장 곧바른 길이고, 절대적 진리이며, 참된 삶, 복된 삶, 창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명상했다.

물론 문맥상 가장 핵심 단어는 ‘길’이다. 단순한 인도자나 모범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바로 그 길(방향, 방법)이고,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바로 그 진리(참된 도리, 법칙)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바로 그 생명(요한복음에 55회 나오는 핵심단어)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황금빛 별 저편에는 누가 살까?"라는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자 방황하는 전(全) 인류를 향한 대박 선언이다.

핵심인 ‘길’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보면 “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진리이기 때문에 목적지로 인도하는 참된 길, 생명이기 때문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이다. 진리와 생명은 길을 수식한다.

이 말씀은 도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도마가 물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절), 요한복음의 도마는 충성스러우면서도 둔한 제자이다. 박윤선 박사는 도마를 ‘지각이 둔한 인물’이라 했다. 도마는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모르면서 아는 척할 수도 없고, 그래서 확실히 알기 위해 정직하게 물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때 주님이 전혀 새로운 말씀을 하신다. 이제껏 헤어지는 이야기만 하셨는데 이제 당신은 아버지 집에 간다며 아버지 집에 가는 길을 말씀하신다.

길,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 길이 목적지에 이르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다. 그 동안도 여러 번 자신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란 의미로 다양하게 말씀하셨는데(8:19,10:1,7,9,37,38,12:26,44,45,49,50) 예수님은 ‘내가 곧 그 길’이라 하셨다. 일반적으로 종교나 철학에서는 ‘도’라고 하면 어떤 명제 식의 진리나 교훈이나 깨달음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그 도가 ‘바로 나’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소린가?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길, 예수님 따라가는 것이 천국의 아버지 집에 이르는 길이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사람들이 “길이 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우성쳐서 불란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런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No Exit!, 탈출구가 없다!”고 했지만 성경은 “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시다’라고 말씀한다.

그렇다. 예수님이 길 되시는 이유는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구원을 의미한다. 또 예수님이 길 되시는 이유는 당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을 살리시는 분, 그래서 그 이름이 생명이시다. 공수표가 아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말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 때문에 기독교는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로부터 배타적, 독선적, 편협적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어쩔 수 없다.

성경은 the way!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것, 이게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의사 제임스 영 심프슨(James Young Simpson)은 1947년 11월 클로로포름(Chloroform)이라는 마취제를 발견했다. 통증 없이 수술받고 통증 없이 출산할 수 있도록 해준 획기적인 발견이다. 그 심프슨이 만년에 모교 에딘버러 대학에서 강연할 때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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