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가인권위, 정상궤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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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일괄적으로 수거하는 것을 인권침해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 10년간 학교에서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수거하는 것을 인권침해로 규정했던 입장을 스스로 바꾼 것이다.

인권위는 지난 7일 전원위원회에서 전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칙에 따라 등교한 학생의 휴대전화를 수거한 조치와 관련해 접수된 진정에 대해 참석 위원 10명 중 8명의 찬성으로 기각 결정했다. 학교 측의 휴대폰 수거가 인권침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인권위는 지난 2014년부터 10년간 비슷한 사건으로 진정한 약 300건에 대해 “인권침해가 맞다”는 의견을 냈었다. 따라서 이번 기각 결정은 전례에 비쳐볼 때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학교가 학생의 휴대전화를 수거하는 것이 교사의 교육권 및 학생의 학습권보다, 학생의 인권이 침해되는 피해가 더 크다는 입장을 줄곧 고수해 왔던 인권위의 입장이 바뀐 것에 대해 가장 당황하고 있는 건 진보 시민단체들이다. 이들은 최근 성명에서 “‘그때는 인권침해가 맞고 지금은 아니다’라는 것인가”라고 비판하며 지난달 취임한 안창호 인권위원장의 보수 성향을 물고 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인권위가 학생들의 휴대 전화 수거 행위를 인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 과연 인권위의 보수화 경향 때문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10년 전부터 이어온 판단이 왜 오늘에 와서 달라졌는지 그 구체적 근거에 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학생들이 교내에서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되면서 최근 들어 사이버 폭력, 교사 불법 촬영 사례 등 인권 침해 문제가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런 문제로 교사와 학생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등 학습권 침해를 더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갈등이 심화되자 교육부가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를 학교에 전달했다. 교권 확립 및 학생의 학습권 보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를 교육 현장에 적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수업 중에 학생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면 교사가 휴대전화를 압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고시에 따른 조치다.

교내에서 학생들의 휴대 전화 사용 문제가 이슈화되자 인권위가 지난 5월 전국 500명을 대상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인권위가 휴대전화 일괄 수거 관련 학칙 개정을 권고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62.3%에 달했다. 이는 인권위의 권고와 학교 현장의 공기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자료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학교들이 학생회, 학부모와 협의를 거쳐 등교 시 학생들의 휴대폰을 수거한 뒤 하교 시에 돌려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번 인권위 전원위는 기각의 근거로 지난해 7월 유네스코가 발표한 ‘2023 글로벌 교육 모니터’ 보고서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네스코는 보고서에서 “혼란과 학습 부진, 사이버 괴롭힘을 막기 위해 학교에서 스마트 폰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라고 권고했다. 또 인권위 아동소위 조사 결과, 인권위가 설치된 전 세계 120개국 중 교내 휴대전화 일괄 수거를 인권침해로 결정한 인권위는 단 한 곳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번 회의에선 학생의 교내 휴대전화 사용 문제에 그동안 인권위가 지나치게 개입해 온 게 아닌지에 대한 자성의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학교 현장의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만 내세우다 보니 관련 사건에서 학교가 인권위 권고를 불수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의견도 대두됐다. 한 위원은 “지난해부터 올해 5월까지 관련 진정 총 77개 중 8개 학교만이 인권의 권고를 수용했다”며 불수용률이 90%에 달한 권고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현실이 이런데도 일부 진보단체를 중심으로 마치 인권위의 보수화가 원인의 전부인 냥 필터링 안 된 비판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이런 비판은 사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위험성마저 있다. 이건 엄밀히 말해 보수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을 무한 방임으로 착각한 그간의 인권위 방향성에 책임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휴대전화는 단지 통신기기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생성·유지·발전시키는 소통의 도구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가 아닌 자율적 통제가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좋은 도구가 왕왕 악용된다는 점이다.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주 임무인 학습과 지도권을 현저히 방해하고 각종 범죄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면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남을 해치는 흉기로 변할 수 있다.

최근 10대 학생들이 사이에서 번지고 있는 딥페이크(인공지능을 이용한 이미지 합성) 관련 범죄가 바로 그런 예다. 이런 범죄에 청소년이 자주 노출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교내 휴대전화 사용을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최근 프랑스와 뉴질랜드 미국 등 인권 선진국에서도 학교 내에서 학생들의 휴대 전화 사용을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추세가 확산하고 있다. 일부 진보단체가 인권위 판단에 대해 “과거로 퇴보한 결정”이라며 한 주장이 얼마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면학을 목적으로 학교가 잠시 맡아두는 휴대 전화에 인권위가 10년 전에 “인권 침해”라고 판단할 때는 휴대 전화가 중고교생의 필수품이 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10년이란 시간 동안 모든 환경이 바뀌면서 예상치 못했던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퇴보다. 인권위가 변화된 현실에 맞게 인권의 지표를 정하는 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인권위가 정상궤도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