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관통하려 하지 말고 성경이 나를 관통하게 맡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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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신성욱 교수

이번 학기 ‘예수님의 비유들’을 가지고 제자 목사들의 설교를 듣고 분석 비평하며 강의하는 수업이 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의 비유들 역시 거의 모든 내용이 잘못 해석되어오거나 제대로 파헤쳐지지 않았음을 잘 안다. 마 18:1~7절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큰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b)라는 말씀으로 교훈을 주셨다.

여기서 어려운 질문이 하나 생긴다. ‘어째서 제자들의 교만을 지적하고 교훈하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예시로 사용하셨냐’라는 점이다. 어린아이의 어떤 점이 제자들을 깨우치는 일에 도움이 되셔서였을까? 성경은 두 가지로 얘기한다. 우선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라고 알려주신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어린아이에게서 배워야 하는 첫 번째 특징이란 말이다.

다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막 10:15)라고 알려주신다. ‘기쁨으로 받들고 환영함’이 아이들이 갖고 있는 두 번째 특징임을 언급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이 하나 생겨난다. ‘그럼 모든 어린아이는 천국에 들어간단 말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이게 해석자들과 설교자들을 힘들게 하고 난처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든 어린아이가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비성경적이다. 원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죄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은 이 비유 속에서 어린아이들을 활용해서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일깨우셨을까?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착함’과 ‘깨끗함’을 보시고 그들을 언급하셨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또한 성경의 진리와 배치됨을 모르고 하는 생각이다. 천국이 착하고 깨끗해야 간다고 하면 그건 ‘아이들의 공로’이지 ‘은혜’가 아니지 않은가!

세월이 지나도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특성 하나는 ‘어린아이는 부모를 의존한다’라는 점이다. 아이들은 집에 와서 엄마가 없으면 운다. 그들은 부모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의존한다’라는 것은 ‘자신의 부족을 안다’라는 걸 의미한다. ‘전적인 의존’이 바로 아이들의 특징이다. 드러내어 자랑할 것이 없는, 공로 의식에 전혀 젖어있지 않은 아이들이기에 뽐내고 과시할 거리가 많은 제자들을 책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게다.

그렇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이라야 천국 입성의 자격이 있다.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알고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공로일 순 없지 않은가! 그건 오히려 은혜를 부르는 수단 역할을 한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뭘까? ‘그렇다면 아이들은 아무 공로 의식 없이 천국을 환영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기에 그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아이라야 천국에 가지 모든 아이들이 천국에 가는 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실 도구로 아이들을 활용하신 이유는 아이들이 천국을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거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서가 아니다. 모든 아이들은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으면 자기가 잘나서 받는 것처럼 생각지 않기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는다. 반면 어른들은 받을 만한 공이 있어서 받는 선물이라 생각하기에 아이들처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아이들이 천국을 선물로 받을 때에 그런 자세를 취해서 예시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하나님을 의존해서 비유로 사용하신 것도 아니다. “~와 같다”나 “~와 같이 되라”는 직유법을 사용하신 의도를 잘 파악해야 본문이 명쾌하게 풀리게 된다. “‘어린아이의 그런 특성’을 보고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을 때 아이들처럼 공로 의식 없이 기쁜 마음으로 받고, 하나님을 대할 때 그들처럼 전적으로 의존하라’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환영하고 하나님을 의존하라는 예수님의 깨우치심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성경 본문 안에 답이 있다. 세심한 관찰력과 문해력으로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 이렇게 말했다.

“The Scripture is to be its own interpreter, or rather the Spirit speaking in it. Nothing can cut diamond but diamond; nothing can interpret Scripture but Scripture.”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자의 역할을 하거나,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 되어야 한다. 다이아몬드 외에는 다이아몬드를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성경 외에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른 성경도 아닌 그 성경 안에서 해답과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이면 마태복음 전후 문맥이나 그 비유 자체 안에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
스티븐 로슨(Steven Lawson)이란 분이 이런 말을 남겼다. “The more I read Bible, the more it reads me.” “성경을 많이 읽을수록 성경이 나를 더 많이 읽는다.”

참 주옥같은 명언이다. 성경을 계속 읽고 묵상하고 되새김질하다 보면 성경 자체가 내게 의미를 깨우치게 하고 내 삶을 해부해서 무릎 꿇고 회개하게 해서 변화하게 하다는 뜻이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영접하는 자”라고 번역했다. 원어 성경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는 자”로 되어 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전자는 ‘어린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순수한 마음으로 영접한다’라는 뜻이다.

반면 후자는 ‘아무 공로 의식 없이 선물 받기를 즐겨하고 기뻐하는 어린아이들의 특성’을 본받아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임에 그런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경 외에는 답이 없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성경 자체가 나를 관통하여 뜻을 알게 하고 무릎 꿇게 한다.
그 엄청나고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고 사는 행복을 모두가 매일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