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학문 빙자한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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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 박사
21세기 들어 학문의 세계는 고삐풀린 말들의 세계와 같다. 이것은 이미 19세기부터 그 현상이 솔솔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0세기 들어서는 너도 나도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고 나서서 될 말 안될 말들을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이고, 그 진화론을 바탕으로 유신진화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신학이란 가면을 쓰고 진화론의 논리를 지지하며, 나아가 그 신학을 가지고 자연 과학계를 넘나들며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진화론, 진화의 뜻이 무엇이며, 무엇이 어떻게 진화했다는 것인가? 진화론 하면 종의 기원을 연구한 찰스 다윈의 원숭이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7만년 전 유인원이 진화하여 오늘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주장하는데, 논리를 반박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니, 그게 그렇게 인간 스스로가 고백할 만한 사실로 보는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서 보면 크리스챤들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믿는대로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 창조로서 이미 완료 되었다. 다만, 그 창조 안에는, 또는 창조 이후 변화, 연합, 분리, 재생 같은 현상들이 나타나 있다. 자연계 안에는 이와 같이 각 종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풀벌레 조차도 고유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서식한다. 진드기는 지금 인간이 생각하고 보고 알고 있는 진드기 그 모습 자체이며, 이들이 살기 위해 행동의 변화도 스스로 한다. 인간과 가장 오래 생존하고 있다는 바퀴벌레 역시, 바퀴벌레는 그 자체의 체형, 체질을 유지한 채 어두운 곳에 살아간다. 유신진화론 입장에서의 생각으로 이런 진드기나 바퀴벌레는 지금 모양 이전, 즉 진화되기 전에는 어떻게 생겼었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또 한 예로, 까마귀도 교육을 시키니 심부름도 하고, 2~3세 아이의 지능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숭이는 원숭이 대로의 DNA를 가지고 있다. 학습을 통해 지능적인 원숭이가 되기도 한다. 까마귀나 원숭이처럼 인간의 초보도 안되는 기술이나 행동을 한다해서 그것을 인간으로 진화되어 간다 말 할 수 있을까?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들은 다양한 자연환경적 변화에 따라 생존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대륙이 붙어 있을 때, 오랜 시간을 거쳐 분리되어 지금과 같은 위치와 현상의 틀을 가지고 있게 될 때까지 수많은 생물들과 동물들이 멸종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새로운 알지 못하던 종이 나타나 자연계 전반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생태계의 변화는 있어도 종자 자체가 진화하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자연과학자들이나 자연환경주의자들도 이러한 환경변화에 대해서 그것을 진화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모든 학문적 이론은 윤리 도덕적 책임이 따른다. 보통 에세이 정도에서도 신뢰감을 주느냐 못주느냐의 개인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학문적 이론이야 더 말 할 나위없는 입장이다. 진화론은 아닐지라도 유신진화라면 그런 논리에 증명을 하든지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증거 없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마침, 시대는 실증주의(Positivism) 시대요, 경험주의(Empiricism) 시대다. 그런 관계로 더더욱 증명이나 경험적 실증이 요구되는데 유신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자연환경적 요구에 대해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지 밝혀야 할 것이다.

인간이 부끄러운 모습을 할 때는 수많은 궤변을 동원하여 2중성을 나타내 보이는 때라 할 수 있다. 아직도 하나님은 창조과정에 있다 주장하면서 유신진화론이란 이름으로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으니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한 느낌을 가질 정도다. 그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진화론자면 진화론자, 유신진화론자면 유신진화론자라 선언하고 자기 주장을 거침없이 밝혀야 한다. 그럴 때 오히려 학문적 양심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당당하면 믿음을 보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더 가관인 것은 유신진화론을 지지해야 현대신학에 대가인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학자인체 하여 유신진화론을 주장하고, 심지어 속된 말로 편까지 든다. “같은 학교 출신이기에, 잘 아는 사이 이기에”와 같은 것이다.

더 불신을 주는 것은 동영상 시대가 되다보니 자신도 한마디 해야 한다 생각하여 이런 저런 인간의 감정, 학문적 지식을 동원하여 유신진화론을 옹호하는 신학인들도 있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가식행위를 하는 것이다. 자신도 한마디 해 보고싶은 심리적 욕망이 그런 마음을 갖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개구리가 자신도 커 보이고 싶어 헛바람을 배에 집어 넣다 배가 터져 죽었다는 말과 동일한 행동들을 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생각들은 세상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생각하지 않는 짧은 소견일 뿐이다. 1993년, 한완상 박사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에 대해 경고한 바 있는데, 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가식적인 학자행세하는 자들에 대해 예언자적 관점에서 비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론에 대한 비판의 판은 학문의 배경 없이 문자주의 창조론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벌어졌다 할 수 있다. 진화든 유신진화론이든 진화론을 불러 일으키게 된 사실적 내용은 성경에 대한 이성이나 고등비평 없이 숫자적 창조론을 주장하는자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학을 기반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비과학적 방법으로 창조를 말하여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일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인간역사 이야기도 우습지만, 창조론자들의 인간역사 연대기에 대한 숫자적 계산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논리적 하단에서는 성경이나 창조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나올 수 있지만, 성숙한 학자들이라면 점차적으로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이나 뜻은 무엇일까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연대기를 말하고자 하는 책인가, 수학을 또는 과학을 말하려 하고 그것을 입증하려 하는 책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 숫자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또는 토질검사나 인간 두개골에 대한 증명을 시도한다면, 이는 신학이 아니라, 수학 교과서나 과학책이 되고 만다.

신이 지금도 창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대 봐라. 까마귀가 공부 좀 했다고 인간으로 진화 할 수 있다는 까마귀 머리정도의 생각을 멈추어야 할 것이다. 신성한 학문을 빙자한 유신진화론도 결코 과학이 아닌 신념에 따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말장난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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