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군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1920) 시대 비행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독립을 위해서 비행기 구입에 애쓴 흔적이 여러 곳에 나타난다. 비행기를 사용하여 국내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일본에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구입에 실패한 도산은 항일 자제들을 광동비행학교, 운남비행학교, 보정비행학교, 남원비행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받게 했다.
1920년 7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주도로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우스에 한인 비행학교가 설립되었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큰 농장을 소유한 김종림이 자금을 지원하고 비행학교의 고문을 맡았다.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 장호, 이용선, 이초, 장병훈, 이용근 등이었다. 교생들은 도쿄로 날아가서 쑥대밭을 만들자는 강한 의욕으로 훈련에 임하였다. 1년간 한인 비행사 40여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1921년 안창남은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하였고, 중국에 망명하여 중국군으로 활약하다가 1930년 4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31세에 목숨을 잃었다. 중국, 러시아, 일본의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활동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중 권기옥, 김동집, 김영재, 김원령, 김은재, 이윤철, 장성철, 전상욱, 차정신, 서왈보, 최용덕 등은 독립유공자이다.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은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동부항공 사령부에서 활약하고 중일 전쟁 때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공군(당시 육군항공대)의 창설에는 중국군 출신 최용덕 장군의 역할이 컸다. 중국 육군군관학교, 공군군관학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수상비행대 대장, 공군지휘부 참모장, 남창기지 사령관, 공군기지학교 교장을 지낸 중국군 고위 지휘관 출신이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총사령부 총무회장을 하고, 광복 후 육군항공대를 창설, 초대 국방차관으로 국군조직법을 제정하고 19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공군을 분리시켜 육군과 공군, 해군 3군 체제를 확립했다.
1952년에는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맡아서 휴전 때까지 항공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공군가도 작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은 10명의 조종사를 일본에 보내서 일본의 미 제5공군에 파견, 무스탕전투기 10대를 인수하여 7월 2일 대구기지에 착륙했다. 인수단장을 맡았던 이근석 대령은 도착 다음 날인 7월 3일 시흥 상공에서 적의 대공포를 맞고 적의 전차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하였다.
김영환 준장은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다. 1951년 9월 강릉 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 작전에 성공하였다. 그는 1951년 8월 해인사에 잠입한 무장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한 폭격 명령을 받았지만, 선별 폭격으로 문화재를 지켜냈다. 1953년 공군 제10전투비행장 단장에 보직되었고, 1954년 3월 5일 F-15기를 조종하고 사천에서 강릉기지로 가던 중 기상악화로 묵호 상공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공군은 애국기 헌납 운동을 통하여 1950년 5월 비로소 훈련기 10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남침 당시 항공기 211대를 보유한 북한 공군에 비하여 연습기와 연락기가 22대에 불과하였고, 총병력은 1,900명에 불과하였다. 드디어 공군 창설 1주년이 되는 1951년 1월 한국 공군은 미 공군에서 인수한 무스탕 전투기 10대로 적의 기지를 목표로 첫 단독 출격에 성공하였다.
1952년 1월 15일 미군이 성공하지 못한 평양 근교 송호리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작전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 작전의 책임자는 김신 대령이었다. 김구 주석의 차남으로 광복군에서 활동하고 공군에 입대했으며, 1950년 7월 2일 주일 미 공군에서 F-51을 인수하자마자 묵호, 삼척지구와 영등포, 노량진 지구에 출격하였다. 제1전투비행단장을 맡아서 미 공군이 수차례 실패한 송호리 철교를 2개 편대 6대의 폭격기로, 초저공 침투 공격을 펼쳐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들 6명의 대위 중 윤응렬 대위는 북한 공군장교로 있다가 1948년 월남하여 훗날 공군 사령관이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때까지 공군은 전투기 133대를 보유한 전력으로 급상승했다. 6.25전쟁 중에는 우리 손으로 비행기를 개발했다. 1953년 최초로 부활호가 제작되었으며, 용산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 공군의 딘 헤스 대령은 ‘공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목사이기도 한 그는 F-51무스탕 조종사 양성을 위해서 1년간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우리 조종사들을 길러냈다. 또한 그는 ‘전쟁 고아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1.4후퇴 전 미 제5공군 군목 러셀 블레이즈 텔 중령과 964명의 고아와 80명의 직원을 C-54 수송기 54대에 태워서 제주도로 피난시키는 일명 ‘유모차 수송 작전’을 펼쳤다.
헤스는 제주도에 고아원을 설립하고 20년간 이들을 보살폈다. 명령 불복종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러셀은 이렇게 진술했다. “누군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놔두는 일이라면 군복을 벗겠습니다.” 제17묘역은 6.25 등 공군전사자 684위가 안장되어 있는 공군묘역이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