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고 말했던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클라이드 M. 내레모어(Clyde M. Narramore)는 저서 『행복에로의 길』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라 했다. 사랑이 곧 행복이라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좀 더 구체적이다. “사랑이 없다면 유창한 외국어 실력도, 천사 같은 달변도, 세상 모든 지식을 꿰뚫는 지혜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자신을 불태워 내어줄 희생도 다 헛된 것”이라며 사랑이 없다면 삶이 아무리 화려해도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러시아 소설가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는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산다”고 했고, 중세 수도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도 “사랑은 그 하나만으로도 모든 짐을 가볍게 해주는 최상의 선”이라 했다. 맞다. 물건은 쓰기 위해 존재하고, 사람은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은 성경 전체의 주제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 하셨고,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4절)며 ‘사랑’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본문에 십자가를 앞둔 예수께서 배신자를 밝히며 큰일이 닥치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심각한 상황에서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한 사람이 소개된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요한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23절)라 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분위기에 상관없이 사랑으로 인해 행복한 사람,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 이름? 그게 중요한가?
역설의 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전도서 7장에 보면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1절)고 한다. 히브리 백성들에게 기름은 그들의 재산을 대표하는 것, 그런데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것이다. 탈무드에도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했다. 맞다.이름은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상징하는 목숨과도 같고, 그 자체가 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름 남기는 것이 재물 추구보다 더 중요하다. 이름값을 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는 익명, 이름이 없다. 그저 예수님의 제자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 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아마 그래서 신기할 정도로 요한복음서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을 것이다. 침례(세례) 요한은 나오는데 세베대의 아들이자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는 열두 제자 중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23절). 그리고 베드로와도 친했다. 요한복음 곳곳에서 요한은 이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란 표현으로 자기를 부른다. 두 번째 장면은 19장에 나온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26절),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이 다 달아났다고 했지만 요한은 자신은 십자가 아래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20장이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2절), 부활하신 무덤을 베드로와 함께 달려가서 보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21장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7절),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건질 수 없었는데 요한은 그때 해변가에 서 계신 주님을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봤다고 한다. 다섯 번째는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20-21), 베드로의 물귀신 작전이랄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요한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을 쓴다. 마지막으로는 요한복음의 기록자가 사랑받은 제자였다고 밝히는 곳에서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1:24).
이 정도면 요한은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주님의 사랑받은 자’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볼 수 있다. ‘내 이름? 그게 중요한가?’ 그런 태도다. 요한은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려고 애쓰기는커녕 스스로 자기 이름 쓰기를 피한 사람이다. 1장에서도 익명 처리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37절), 두 제자가 안드레와 요한이다. 18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15절), ‘또 다른 제자’가 요한이다. 베드로는 두려워 멀찍이 따랐지만 요한은 주님 곁자리를 지켰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기에 자기 이름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만 산다고 고백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일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고백(20절)은 자신은 ‘그리스도의 아바타 같은 존재’라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 바울마저도 자신의 서신서에 자기 이름을 많이 남겼지만 요한은 계시록 외에는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바울 외에도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만 산다고 고백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그 중 한 분이 일제시대 대표적인 부흥사로 초창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김익두 목사이다. 이분을 통해 주기철 목사, 김재준 목사, 이성봉 목사가 회심했다. 그런데 이분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망나니였고 깡패였다. 안악골 호랑이라 불릴 정도, 사람들은 김익두만 보면 슬슬 피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후 지난날의 삶이 부끄러워 자기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음을 공적으로 알리기 위해 부고장을 돌렸다. 내용은 “김익두는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에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런데 죽었다는 김익두가 까만 성경책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깡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사람들은 정말 김익두가 죽었는지 시험하기 위해 어느 날 실수인 척하며 구정물을 뒤집어씌웠는데도 김익두 목사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툴툴 털고 “옛날의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하시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당신은 성하지 못했을 것이요. 하지만 지금의 김익두는 옛날과는 다른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오”라고 했단다.
자기 이름보다 그리스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요한도 바울도 김익두도 모두 빛나는 이름이 되었다. 자기 이름을 위해 산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 내 속에 가득한 이름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이 가득 찬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요한의 머릿속도 가슴속도 마찬가지다. 그는 평생 예수님의 말씀만 묵상한 사람 같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한 사람, 형제 야고보가 순교 당하고 다른 사도들이 선교에 목숨을 걸 때 요한은 조용히 칩거하며 말씀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제자 양육에 힘쓴 것이다. 그래서일까? 요한복음서는 다른 어떤 성경보다 심오하다. 오죽하면 요한복음은 초신자 때가 아니라 나이 들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가 간다고 할 정도다. 온통 그리스도로 꽉 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요한은 자기 인생이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평생을 산다.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를 모시고 터키의 에베소 깊은 산속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래서 에베소에는 바울보다 요한이나 마리아의 유적이 더 많다.
마리아를 섬기며 사랑을 배운 사람, 그는 사랑의 놀라운 힘을 깨닫는다. 그래서 유일하게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고 소개한다(34절).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계명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 삼위일체를 잇는 견고한 끈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그 강력한 사랑을 단 한 마디, ‘하나 됨’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 일치를 이룬다. 줄곧 예수님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고, 예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한다.
이렇게 사랑을 깨닫고 경험한 요한은 자신도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룬다. 그래서 요한의 말이 곧 예수님의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 영접이 하나님 영접이라 했는데(20절) 사람도 그렇게 대해야 한다. 그게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스타일이 달라도 사랑하고, 생각과 취미와 성향이 달라도 사랑해야 한다. 아직도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나? 안 된다. 그동안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며 이게 곧 계명(Commandment)이라 하신다. 명령이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 품이 너무 좋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의 자기 모습을 특이하게 표현했다.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23-25절). ‘예수의 품, 가슴에 의지하여 누운 자’, 퀴어신학에서는 이 구절을 예수님이 동성애자였다는 근거라고 해석하려 하지만 억지요 시대착오적 주장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나 기독교 문화는 절대 반동성애였기 때문이다. 동성애의 선천성과 성적 지향 주장은 극히 근래에 와서 생긴 것, 전에는 동성애 그러면 한 마디로 ‘비정상’이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은 분명 남자와 여자만 창조하셨는데 ‘제3의 성’ 타령하며 존중, 인권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행위이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타락이다.
요한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당시의 식탁 문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당시 유대나 로마식 식사는 원형이나 반원형으로 세팅하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고, 좁은 공간에서는 서로 포개어 눕듯이 진행되었기에 예수님 오른쪽에 있던 사랑받은 제자는 예수님 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요한이 자신을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식탁 세팅 상황만 묘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주님과 긴밀한 사랑과 연합을 상징한 표현이다. 1장에서 예수님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18절)이라고 표현했던 요한은 영적 연합이지만 표현 강도는 육체적 연합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깊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썼다. 예수님을 마치 부부가 된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품이 너무 좋다.
중세 수도사들도 예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추구했다. 16세기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ia de Avila)는 기도를 7단계(7맨션)로 나누며 그 마지막 완성을 ‘신비적 결혼’이라 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완전 합일되는 것을 ‘결혼’으로 묘사한 것이다.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가 조각한 ‘성녀 테레사의 환희’(ecstasy)라는 작품도 재미있다. 테레사 수녀가 입신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인데 천사가 화살창으로 테레사의 가슴를 찌르려고 하는 순간 테레사 수녀의 모습이 야릇하다. 마치 성적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이다. 예수님 사랑한다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맞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이 너무 좋다. 미치도록 좋다고 하면 이해될까? 1930년대 부흥사였던 이용도 목사도 예수께 미친 분이었다. 그의 설교는 “하여간 미치자! 크게 미치자! 진리에 미치자!”였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나?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에 보면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이란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거리에서나, 비어있는 모든 전화기 앞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전화의 구속은 점령군의 그것보다 훨씬 집요하다.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전화란 단 두 가지 종류로 간단히 나눌 수 있다. 그 혹은 그녀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와 그 밖의 모든 전화. 이렇게도 나눌 수 있다. 전화벨이 울리면 그 혹은 그녀일 것 같고, 오래도록 전화벨이 울리지 않으면 고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뭔가? 기다리며 행복하고, 목소리 들으며 행복하고, 보면서 행복하며, 함께 있으면 좋은 것, 그게 사랑이다. 상원의원이던 로렌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는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고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너무 슬펐다. 낙심했다. 살 의욕도 목적도 다 잃었다. 그런데 슬픔을 당한 그날 밤, 아들이 꿈에 나타나 “아버지, 이 세상에는 아들이 많아요. 젊은이가 많아요. 나 대신 그들을 사랑해 주세요.” 꿈에서 깨어난 스텐포드는 스탠포드라는 유명한 대학을 세웠다.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카운티에 있는 명문 아이비 리그, 최고의 대학이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남김없이 젊은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유서를 남겼다. 그는 진정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였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나? 그렇다면 사랑을 느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작가 생텍쥐페리(Saint Exupery)가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는데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주님의 이유 없는 사랑, 계산 없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누워서 그 사랑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래서 계속 자기를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다. 미지근하면 안 된다.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괴테의 말이 맞다. 요한처럼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확신으로 미친 듯이 사랑하며 사는 행복 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