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오피니언·칼럼
설교
박진호 목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3,34)

이 두 구절에서 뭔가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없습니까? 혹시 두 구절의 순서를 예수님이 잘못 배치한 것 같지 않습니까? “내일 일보다 오늘 일만 염려하라. 염려는 하나님께 모두 맡긴 다음에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이 뜻의 흐름이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대신에 본문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전혀 필요 없는 말씀을 사족처럼 덧붙인 것입니까? 그래서 더욱 강조하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 구하는 것보다 염려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까?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착각하여 말의 순서를 뒤바꿀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뒤에 “염려 말라”를 결론으로 제시했기에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염려와 직접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 나라와 의가 단순히 세상 염려를 완전히 초월하고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하며 영적으로 신령한 모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소한 본문이 속한 문맥 안에서 뜻이 그러합니다. 문맥 안의 뜻이라고 경시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6:19-34의 전체 문맥은 재물에 대한 염려가 그 주제입니다. 당시로선 일용할 양식이 가장 시급한 염려거리였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마실 것은 365일 내내 그치지 않는 고난의 주제였던 셈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와 의에 관한 가르침은 오직 33절에만, 간접적으로도 24절 한군데만 나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24절) 재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 자신의 삶과 인생을 주관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통치 받으면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재물이 왕이 되어 나를 통치하면 돈의 나라가 됩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염려가 없어야 재물의 통치를 받지 않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궁핍해도 자신의 삶과 인생을 궁극적으로, 아니 바로 지금 완벽하게 주관하는 이가 따로 있음을 확신해야만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주인이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기에 현재 겪는 어떤 환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능하신 손아래 있다는 철저한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통치하고 계시다면 자연히 그분의 의는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대신 계획해서 이뤄나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어림짐작조차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니까 그분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일을 우리가 결정해서 이루도록 기도하고 희생해서 헌신해야만 한다고 자꾸 착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내일 염려는커녕 오늘 염려도 제대로 없애지 못하는 우리 믿음의 수준에 비추면 분수에 넘치는 교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영원하신 경륜에 따라 당신께서 세우고 시행합니다. 우리로선 그분의 의가 우리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당신의 주권대로 드러내주길 소망할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은 그분의 의의 도구가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원하는지, 또 진정으로 순종하여 실제로 그분에게 쓰임 받고 있는지 여부일 뿐입니다. 이에서 더 나가는 것은 자칫 영적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분만 섬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훨씬 이전에 십계명의 첫 계명도 바로 그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가장 먼저 또 일생 동안 마땅히 할 바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인간도 아니라는, 최소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신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증하는 셈입니다. 요컨대 바로 이 첫 계명이라도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진짜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있다면 그래서 그분의 완전한 통치를 받고 있다면 그분의 의가 들어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진리입니까? 또 다시 하나님이 좋은 일로 북 주시리라 섣불리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분의 의를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부담과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은혜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재물로 인한 내일의 염려를 그치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체는 내일의 염려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내일도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만 염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염려만 하라고 해서 종일 걱정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늘 중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 열심히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내 일생의 단 한 순간도 주님의 의로운 통치를 벋어난 적이 없음을 확신하는 바탕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신 순서는 정확합니다. 내일 일이든 오늘 일이든 염려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의가 드러나는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오늘과 내일의 염려 거리를 없애 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도 그분과 주고받을 기대나 계산을 끝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이는 큰 잘못일 뿐 아니라 너무나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오늘 그분의 통치를 온전히 받지 않고 있으면 내일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또 내일 염려를 하고 있는 자는 오늘 염려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의미를 잘 헤아려야 합니다.

얼마나 우리 믿음이 보잘 것 없습니까? 환난을 없애려는 목적 말고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진배없습니다. 어떤 큰 환난 중이라도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통치를 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인데도 그조차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런 확신에 거하기에 실제로 요동하지 않아야 믿음이 실현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니 그분의 나라는 이미 이뤄졌고 또 그분의 의도 자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종교적 일에 열심을 내면 그분이 염려를 없애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그럼 예수님 말씀을 진짜로 거꾸로 읽은 것입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주님은 지금의 순서로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대신 감당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2011/6/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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