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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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신성욱 교수

간결한 문장을 하나를 발견했다. “함께 붙잡고 있는 인연의 끈인 줄 알았는데, 나만 놓으면 사라질 줄이었다.”/가린

이렇게 되어 있었다. ‘가린’이 가수 이름인지 잘 모르겠고, 어떤 배경에서 이런 글이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짝사랑’을 뜻하는 것이리라. 사업하는 일에 있어서 협력자나 동반자였다면 ‘혼자 착각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살다 보면 배신당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그게 상처가 되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가 아주 많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케이스는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이 오해하거나 착각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어떤 이성을 좋아하는데, 상대방도 나를 좋아할 것으로 믿었다가 걷어차이면 배신감에 쓰라린 상처를 얻게 된다. 하지만 상대방은 처음부터 나를 좋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좋아했듯이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으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기에 상대방에겐 책임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이런 일들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과 다툼과 비극들이 참 많다. 그런 경우는 나마저 인연의 끈을 놓으면 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고 만다. 그렇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는데, 혼자 상대방을 좋아하고 관심 가지려는 이는 많지 않다. 상대방의 뜻을 파악한 순간 나 역시 인연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해서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사람의 관계는 이해타산에서 비롯된 것이 많기에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무한 행복자’이다. 나를 붙잡고 영원히 놓지 않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 신뢰가 부족하거나 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그 끈을 놓아버리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은 결코 나를 놓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인연의 끈은 견고하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주님의 손’이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라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음을 본다. 그게 맞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하지도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의 영원을 보장해놓으셨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그 어떤 일을 통해서도 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천국 보내기로 예정하고 이 땅에 보내셨는데, 나의 부족과 허물과 죄로 인해 지옥 백성으로 떨어지는 걸 막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렘 1:5a)라는 구절들이 보이는가? 우리가 모태에서 잉태하기 오래전부터 천국 백성으로 성별되었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을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만일 내 허물과 믿음 부족 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면 저 두 구절에 기록된 내용은 거짓이란 말인가? 어차피 내 힘과 내 선함과 내 공로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그분에 대한 의심을 가질 때가 있다. 심지어 하나님이 잡고 있는 인연의 끈을 인간 쪽에서 놓는 경우마저 있다. 연인이나 부부관계처럼 한쪽만 끈을 놓아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관계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런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한순간 하나님이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있어도, 우리의 손목을 굳게 잡은 하나님의 손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어야 하고, 그게 맞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가봐야 우리의 구원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 ‘칭의 유보론’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전혀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에게 ‘보라 앞으로 믿음이 점점 더 자라고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미래에 새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믿는 바로 그 순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법정적 선언’이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완벽하게 의롭게 살아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비록 아직은 의인이라는 법적인 신분에 맞는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의인’이라는 ‘법적인 신분’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한쪽이 손절함으로써 신뢰했던 친밀한 관계가 깨지기도 한다. 두 사람이 인연이 되어 결혼한 부부였더라도 한쪽이 손을 놓으면 다른 쪽도 손을 놓고 이혼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한 번 맺은 인연의 끈은 절대 놓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늘 기억하고 살자.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안전성’과 ‘최종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구원의 근거를 한계 많고 약한 우리 자신에게서 찾는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한 번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영원 천국까지 놓지 않고 견고하게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손길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기쁨과 감사와 자부심으로 멋진 하루를 살아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