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임종석 전 의원이 ‘통일 하지 말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는 주장을 해 정치권에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 중 한 말인데 ‘2국가론’이 지난해 말 북한 김정은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점에서 북한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임 전 의원은 연설에서 “통일, 하지 말자.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 한반도 미래는 후대 세대에게 맡기자”라고 말했다. 이어 헌법 3조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조항의 삭제 또는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를 정리하자는 주장을 거침없이 했다.
임 전 의원이 이 날 한 말은 본인이 지난 30년간 부르짖어온 ‘통일론’ 주창과 너무나 동떨어져 의아하고 놀랍다. 오죽하면 민주당에서까지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란 반응이 나오겠나. 일각에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이 평소 행보와 상반된 주장을 할 만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란 말이 나온다.
임 전 의원의 얼굴과 이름이 대중에 처음 알려지게 된 건 지난 1989년 한국외국어대 4학년이던 임수경이 불법으로 북한에 들어가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사건 때였다. 당시 임수경을 남측 학생 대표로 뽑아 북한에 보낸 사람이 바로 당시 전대협 의장이던 임 전 의원이다.
그는 임수경 방북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에 입문해 2000년 16대 총선에서 34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통일에 걸림돌이 된다며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 서는 등 친북 성향의 정치활동을 해왔다.
이 시점에서 좀체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 있다. 지난 2019년 1월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물러나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한 그의 고별인사다. 학생 운동권에서 출발해 국회에서 정치인의 입지를 다지고 문재인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고 물러나면서까지 ‘통일 운동’에 매진하고 싶다고 한 그의 의지가 어쩌다 불과 5년 만에 “통일, 하지 말자”로 180도 바뀌게 됐을까.
그가 “통일, 하지 말자”라고 연설한 자리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도 함께 있었다. 알다시피 문 전 대통령은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은과 손을 맞잡고 “통일은 겨레의 여망”이라고 합의했던 당사자다. 문 전 대통령 뿐 아니라 민주당 정부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입버릇처럼 통일의 당위성을 꺼냈다.
임 전 의원의 반(反) 통일 주장을 한낱 개인의 견해로 그칠 수 없게 만든 게 ‘2국가론’이다. 남북을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하자는 말인데 반 헌법적 발상인데다 지난해 12월 북한 김정은이 먼저 화두를 던진 내용과 너무나 흡사해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지는 형국이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제8기 9차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 그러면서 “전쟁 중인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더 이상 통일의 대상이 아닌 전쟁을 앞둔 두 국가라는 뜻이다.
김정은이 선대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인 ‘적화통일’을 포기하고 ‘2개 국가론’을 꺼내든 건 존립이 위태로울 만큼 심각한 내부 사정 때문일 거란 분석이다. 이걸 통일 자체를 완전히 포기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섣부른 판단이다. 언제든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게 북한의 실체다.
야권에선 임 전 의원의 발언이 가져온 파장에 개인의 생각일 뿐이라며 애써 선을 긋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인사가 임 전 의원 한 사람만이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세현·이종석 두 전직 장관을 비롯해 역대 진보 정부의 대북 실세들도 ‘2국가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임 전 의원의 이 발언도 사석에서 나온 게 아니다. 전직 대통령과 통일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한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을 누가 사사로운 자리라고 하겠나. 지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기가 모셨던 전직 대통령과 함께 연단에 올라 연설한 내용이라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임 전 의원의 ‘2국가론’ 주장 못지않게 심각한 게 헌법 3조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돼 있는 헌법 3조를 삭제하라는 주장은 대한민국의 존립 근거와 정체성까지 모두 지우자는 말로 들린다. 북한이 핵무기로 위협하는 현실에서 난데없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용납하기 어렵다. 그의 주장에 반색할 데가 김일성 때부터 ‘고려 연방 통일론’을 주장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줄기차게 주장해 온 북한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전보다 많이 식고 옅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MZ세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통일, 하자말자고 할 권리는 국민 누구에게도 없다. 통일은 대한민국이 포기할 수도, 포기해서도 안 되는 목표이자 나아갈 방향이기 때문이다.
30년간 통일을 외쳐온 정치인이 왜 갑자기 반 통일 인사가 됐는지 구구한 설이 나돌지만 솔직히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런 반 헌법적 발상이 자칫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런 위험한 화두가 국론 분열의 불쏘시개가 되지 않도록 경계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