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와 선교에 있어 초기 의료선교사들의 공헌은?

  •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주제 세미나 개최
한국개혁주의연구소가 강남구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를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들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최승연 기자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목사)가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초기 내한 의료선교사들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는 예배, 논문발표 순으로 진행됐으며 예배에선 오덕교 목사의 인도로 안명준 목사(한국 성서대 초빙교수)가 대표기도를 드렸다. 이어 현창학 목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가 성경봉독 및 ‘감사의 기적’(역대하 20:20-26)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정효제 목사(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이사장)가 축도했다.

이어진 논문발표는 이승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님송석좌교수)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박응규 교수(ACTS 명예 교수)가 ‘로제타 셔우드 홀의 의료 및 장애인 선교와 한국 교회사적 의미’, 민성길 교수(연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가 ‘맥라렌 선교사, 진주배돈병원, 세브란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 이상규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교수)가 ‘미국 남장로교회의 의료선교’라는 주제로 각각 강의했다.

박응규 교수는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1865년 9월 19일 뉴욕주의 리버티에서 태어났으며 신실한 감리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은 누구나 다 동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며 이러한 배경이 로제타로 하여금 훗날 조선의 여인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지극히 섬김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도록 했다”며 “홀 선교사는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졸업한 이듬해인 1890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의해 조선으로 파송되었다”고 했다.

그는 “로제타 홀 선교사는 조선 땅으로 와서 여성병원과 의료 선교를 통한 한국 여성들을 위한 선교거점을 확보하여 그 이후의 선교 발전이나 각 분야의 우수한 근대 여성 지도자들을 키우는 데에 있어서 지대한 공로를 남겼다. 여성과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의 확대를 위해서는 여성병원을 많이 설립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인의 진보된 사고이며 가장 무시 받고 소흘한 대접을 받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병원이 기독교의 이상에 더 부합된다는 그녀의 이상과 그에 따른 헌신과 희생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한국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지대한 영향과 혜택을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특히 당시 남존여비 사상 혹은 내외법 관습으로 서양의학의 의료혜택에서 소외되기 쉬웠던 여성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서양의학 그리고 서양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선교의 거점이자 보루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했다”며 “또한,홀 선교사는 다양한 여성의료기관을 통해 한국 여성들에게 전도부인, 간호사 그리고 의사 등과 같은 직업여성의 모델과 근대적 의학을 통한 근대지식에 대한 탐구의 계기를 제공함으로 여성들의 개화와 근대의식 함양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로제타 홀이야말로 조선 최초의 서양의학 여성병원인 보구여관, 서울 동대문에 세워진 볼드원진료소 그리고 평양에 지방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무엇보다도 여의사로서 진료하며 복음을 전도하는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었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그리고 그녀는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 박에스더를 비롯한 많은 초기 의료인을 배출하고 많은 의료기관을 세우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동대문에 세운 볼드원진료소는 오늘날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했고 남편 윌리엄 홀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기홀병원은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확장되었으며, 평양에 광혜여원과 인천에 부인병원을 세웠으며 또한 여성의료인을 배출하기 위해 세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오늘날의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자리잡았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일찍이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로제타 홀은 교육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평양 여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세운 광혜여원 옆에 우리나라 최초의 맹아학교를 설립했고 직접 점자책을 만들어 맹인 소녀들을 교육했다. 맹아학교가 자리 잡은 후에는 농아학교를 세워서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기반을 닦았다. 로제타 홀은 1894년부터 점자사용법을 개발하여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교육을 시작했고 1909년에는 청각장애인교육으로도 확대했다. 그런 면에서 로제타 홀이 운영하던 시각장애인 교육기관은 한국 근대 특수교육의 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평양에서 오랜 세월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한 로제타 홀은 ‘평양의 오마니’라고도 불렸다. 조선 여상을 해방시켰다 하여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과 비유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연구되어야 할 인물이다. 한국 기독교회사 및 선교사와 여성사, 교육사 그리고 의학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한 인물이 한 시대와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렇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실례는 찾아보기 아주 힘든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민성길 교수(연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가 ‘맥라렌 선교사, 진주배돈병원, 세브란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승연 기자

이어 민성길 교수가 ‘맥라렌 선교사, 진주배돈병원, 세브란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민 교수는 “찰스 인글리스 맥라렌 교수는 호주 장로교 의료 선교사이면서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1911년 같은 선교사인 부인과 같이 한국에 와서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될 때까지 32년간 진주배돈병원, 세브란스 정신과 교수로서 사역했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감옥과 연금생활을 한 후 추방되었다”고 했다.

그는 “맥라렌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정신질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의 정신질환자를 돌보고 한국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믿고 교육시켰고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근거하여 그의 독특한 의학철학과 인도주의 사상을 제시하고 실천한 의사였다. 그는 열정적으로 성경을 탐구하고, 열정적으로 기독교를 전하고, 열정적으로 환자를 돌보고, 열정적으로 영적 의학을 추구했다. 그에게 신사참배 반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제 생각에 맥라렌은 슈바이처와 대조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같은 시대, 같은 선교사, 같은 의사 그리고 다같이 미지의 땅에서 봉사했다. 그러나 슈바이처와 달리 맥라렌은 사상적으로 보수적 신앙을 견지했다. 그는 동양사상에 대해 존경했으나, 슈바이처와 달리 이를 자신의 신앙과 혼합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위대한 가르침이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지식에 그리고 내가 치료 도중 곤란함에 빠질 경우 때때로 내게 길을 비춰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거듭 되돌아가게 된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인 후학을 교육시켰고 세브란스 정신과에 후계자를 남겼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르침은 세브란스 내에서 체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그의 제자 이중철 교수는 일제 말 스승의 길을 따라 학교를 떠났다. 세브란스 신경정신과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현재 소수이지만 그의 제자들의 후예들이 맥라렌 교수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했다.

끝으로 민 교수는 “현재 의학에는 다양한 첨단 이론과 기술들이 발달하고 있으나, 그가 몸소 보여준 바, 일정하고 견고한 의학철학에 기초하고 열정적이고 진지한 기독교적 태도와 신앙을 견지하면서 환자를 돌보라는 가르침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도전이 돤다. 한가지 제언하고 싶은 것은 늦은 감이 있찌만, 진주에 과거 배돈병원이 기여한 바를 우리가 잊지 않게 기념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남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이상규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교수)가 ‘미국 남장로교회의 의료선교’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최승연 기자

이어 이상규 교수가 ‘미국 남장로교회의 의료선교’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교수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5개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선교부 별로 의료활동을 전개했는데 다른 장, 감 선교부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 선교지부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했다. 병원 설립의 경우 미국 북장로교가 1885년 4월 서울에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한 이후 감리교의 시병원, 북장로교의 보구녀관이 설립되었고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여러 선교병원이 설립되었다. 즉 전킨 기념병원(부산, 1891), 래드병원(평양, 1893), 기홀병원(평양, 1897), 구세병원(원산, 1896), 동산병원(대구, 1897), 미동병원(선천, 1901), 던칸기념병원(청주, 1903), 아이베이병원(개성, 1907), 제혜병원(함흥, 1908), 게례지병원(강계, 1909), 배돈병원(진주, 1913) 등이 그것이다”고 했다.

그는 “1913년까지 남장로교 선교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3개의 진료소, 30개의 선교병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병원은 1940년까지 유지되었고 대동아전쟁 전후 다수 병원은 폐쇄되었고 일부는 한국인에게 이양되거나 양도되었다”며 “주한 각 선교부는 의료선교를 중시하여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의학교육을 시작하게 되자 선교부 간의 상호협력과 연합이 요구되어 1911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가 조직되었고 의료선교사들 간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어 “의료선교사협의회에 의하면 1938년 당시 주한 의료선교사 수는 317명이었는데 선교부별로 보면 미국북장로교 84명, 남장로교 44명, 호주 장로교 11명, 캐나다장로(연합)교회 22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명, 안식교 10명, 독립선교사 21명이었다”며 “해당 자료를 통해 한국에서의 의료선교 활동에서 남장로교 선교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름할 수 있는데 남장로교는 5개 선교지부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의료선교 활동이 남긴 공헌은 일반적으로 몇 가지로 정리되는데 호남지방에서 사역한 남장로교회의 경우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의료선교 활동은 첫째, 기독교적 자애에 기초하여 한국인들을 시료하여 재활, 재생의 길을 가도록 도움을 주었고, 둘째, 서양 의술의 전파를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셋째, 의학교육과 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 양성에 기여하였고, 넷째, 예방, 시약, 치료, 공중위생 및 보건증진 등을 통해 한국에서의 보건 의식의 함양 및 의료환경을 개선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사회발전에 기여했고 한국인의 삶의 질을 행상시켜 복음전파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개혁주의연구소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