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명확하게 교회공동체로의 대체 개념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거나 의미적으로 상대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승사적으로 예수 전승은 복음서 이전의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없는 교회공동체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서 이런 입장은 예루살렘이 다시 유대교의 중심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시대적 상황이 연결되어 있다. 첫째, 기독교가 점차 유대교의 우산에서 벗어나면서 유대교와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안정화되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강등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둘째, 70년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하여 유대교 안에서 제기된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해석에 대응하면서, 옛 질서 하의 예루살렘과 새 질서 하에 대체된 예루살렘인 교회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윤석이 – 예루살렘 신학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제국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존재, 지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최초의 이방 출신 예배자로 시작되는 데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다. 출애굽 구원의 중심인 유월절에 우슬초가 있었다면 예수님의 유월절 골고다에도 우슬초가 있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워하는 예수님의 입에 쓸개 탄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입에 가져다드릴 때 쓰인 것이 우슬초였다(요 19:29). 이스르엘 골짜기와 요단 골짜기가 만나는 풍요로운 땅 벧산에는 로마 시대 유적이 잘 남아 있다. 이곳은 유대인 학자들이 “만일 에덴동산이 이스라엘에 있었다면 그 입구는 벧산이었을 것이다”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가 만나야 할 니느웨 주민, 이방인 고넬료, 박해자 사울은 누구인가? 그 니느웨 주민을 만나고, 이방인 고넬료를 마주하고, 박해자 사울과 같이해야 한다.
권종렬 – 이스라엘 땅에서 말씀 찾기
사실 ‘2인자’라는 언어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1인자가 될 가능성이 있거나 욕망이 있는 사람이 2인자입니다. 내가 2등인데 앞에 있는 한 사람을 기어이 제치고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다. 만약 내 선택이 아니라 제도적 제약이나 관계적 편애 때문에 계속 2인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면 내적 분노도 대단할 것입니다. 물론 멈출 줄 모르고 점점 더 치열해지는 오늘날에는 무한경쟁에 지쳐 ‘B급 감성’을 즐기는 문화도 있지만, 어쩌면 거기에는 ‘여우와 신포도’처럼 내 정신 건강이나 챙기자는 마음이 깊숙이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는 수직축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내 역할’은 있을지언정, 순위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백소영- 성서 속 2인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