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이사장 임석순 목사)가 13일 서울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제3회 순교신앙 함양 조찬기도회 및 순교자 신앙발표회’를 개최했다.
행사는 예배, 순교자 신앙발표, 기도회 순으로 진행됐으며 예배는 이용상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상임 부이사장)의 인도로 드려졌다. 최해욱 장로(해방교회 은퇴장로회 회장)가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이어 박영국 목사(해방교회 담임)가 ‘순교자적 신앙’(베드로전서 2:19-20)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 목사는 “성경을 보면 엘리야가 선지자들과 싸우고 난 이후 너무 지치고 힘든 나머지 하나님께 사명을 감당하기 힘들며 지금 당장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보시고 위로하시고 더 큰 용기를 주셨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다시 일어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우리가 종종 믿음이 좋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대해서 연쇄적인 태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하며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사는 것이 별로 의미 없는 것이고 죽으면 다 놓고 가게 되니 더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삶에 이런 태도, 이런 연쇄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와 믿음의 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도 요한이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친 것은 이 세상을 뒤로하고 멀리하고 주님께 부름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림을 받는 세상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간절히 하나님께 그렇게 다시 결단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라며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금신상에 절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며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해방교회 초대 목사님이신 허은 목사님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순교의 길을 가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믿음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교자적 신앙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세상은 교묘하게 우리의 믿음을 옥죄고 있으며 더 많은 우상이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위협 속에서도 세상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내가 사는 길이며 참된 능력의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이런 각오와 믿음으로 외쳐야 될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박 목사는 “순교자적 신앙은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과 주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려는 압력이 있더라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정영택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이사)가 축도했으며 예배는 마무리됐다.
이어진 순교자 신앙발표에서 안병철 목사(미국 풀러신학교 선교목회학 박사, 대곡교회)가 ‘순교자 허은 목사의 생애와 순교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안 목사는 “한국교회는 올해로 선교 140주년을 맞이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수많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성숙하고 성장해 왔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교회의 역사를 가리켜 박해와 고난의 역사라고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해와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도 한국교회와 지도자와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환난을 피하거나 외면하기보다 신앙으로 맞섰다”며 “한국교회 순교자 허은 목사는 1913년 2월 28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연수동 316번지에서 허석현 장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1907년 설립된 연수교회에 출석하며 세례를 받고 집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기 한국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에 부유한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다”고 했다.
그는 “허은 목사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거쳐 선천성경학교를 수료했다. 이후 1935년 서울로 와서 피어선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졸업했다. 같은 해 안동교회에서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했다. 1년 후 그는 일본 닛폰대학교 종교과에 입학했는데 그가 일본으로 가게 된 이유는 당시 안동교회를 담임하던 최거덕 목사가 닛폰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추천서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1941년 닛폰대학교에서 졸업하고 귀국한 허은 목사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같은 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44년 제39회로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안 목사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허은 목사는 1946년 평인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풍천교회를 담임했다. 그가 담임 목회를 하기 전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는데 해방을 맞이하기 2달 전 얄타회담에서 이뤄진 비공식적인 합의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한 지역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소련 군정이 들어섰고, 남한 지역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 군정이 들어었다. 이런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태는 해방을 맞이하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당시 많은 목회자가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1946년 10월 25일 ‘북한 오도 연합 노회’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모였는데 당시 이들은 공산정권이 주도하는 입법부설립을 위한 총선거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문을 작성하여 김일성과 소련군 사령관에게 보내기로 하며 5개의 조항을 성명서에 작성하며 결의했다. 이들이 발표한 결의문 내용의 핵심은 정치와 기독교를 엄격히 구분하며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외에 어떤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는 것, 예배당의 신성 확보,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경우 교직에서 사면되는 것 그리고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안 목사는 “이 결의문이 발표된 이후 공산정권은 기독교 세력을 강제적으로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교회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결의문을 반박하기 위한 결의문을 준비시켰는데 그 내용은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선거에 솔선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직하며 여기에 가입하지 않는 목회자는 추방하거나 인민재판을 받게 했다. 이로 인해 복한 오도 연합 노회에 가담했던 목회자들은 순교를 당했으며 허은 목사는 시무하던 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게 되었고 교회가 폐쇄될 위기에 처하자 남한으로 월남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은 목사는 월남 이후 전라북도 중포에서 목회하는 친구 김성모 목사의 소개로 1948년 10월 고창읍교회에 부임하며 남한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풍천교회를 두고 온 것이 하나님 앞에 죄송하여 그곳에서 더욱 목회에 열심을 내었고 전국 각지 교회의 요청으로 부흥회를 섬기게 되었다”며 “한 번은 허 목사가 한경직 목사로부터 영락교회 부흥회를 인도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한 주간 인도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 해방촌에는 평안북도 선천과 철산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허 목사는 그들과 함께 1947년 3월 해방교회를 개척했다”고 했다.
안 목사는 “허은 목사가 개척한 해방교회는 날로 부흥하며 뜨거운 신앙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주일에 북한 김일성이 남침하는 전쟁이 발발했다. 허 목사는 당시 예배 후에 북한성도협의회 모임에 참석했다가 정부에서 발표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었던 성도들은 우왕좌앙 하다가 남침이 시작된지 이틀 뒤 허은 목사는 기도 후 해방교회 성도들에게 ‘양 때를 버리고 온 내가 또다시 양 때를 버리고 피난할 수는 없소. 나는 본래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여러분이 자꾸 피난을 권유하면 마음이 흔들릴지 모르니 나에게 절대 피난을 권유하지 마시오. 나는 끝까지 이 재단을 지킬 것이오’라고 했다. 그는 공산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에 있으면서 서울을 지켰다. 그는 가족들을 피신 시켰지만, 같은 해 7월 25일 새벽 무장한 공산군에 의해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결국 순교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허은 목사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공산군에 서울이 점령당해 많은 사람이 피난을 가던 그 고난의 순간에도 언제나 하나님 재단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 그의 아들 허전 장로에게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허은 목사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순교신앙은 그 가족은 물론 해방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한국교회에 값진 유산이 되었고 지금도 생생하게 해방교회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다”며 “해방교회 원로 이승하 목사는 허은 목사의 생애 가운데 주목해야 할 점으로 ‘평범하고 유익해 보이는 삶의 결단으로 위대한 순교의 신앙을 이루어 낸 점’이라고 말한다. 허은 목사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였고 인자한 목사였으며 자신이 예수를 사랑하는 만큼 성도들을 사랑하는 목회를 하는 목사였고 추진력이 있는 목사였으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순교신앙을 이어가는 목사였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이어진 기도회는 김정훈 목사(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서기이사)의 인도로 진행됐으며 참석자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북한 동포들과 세계 선교를 위해”라는 기도 제목을 붙들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