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 당시 파라오는 누구인가(下)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으며 궁금해 하는 내용 중 하나는 출애굽 당시 홍해에 수장된 이집트의 파라오는 누구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집트의 표준 연대기는 이집트 정부에서 지금도 새로운 역사 유물이 발굴되면 그에 따라 수정 보완을 하며 정립해 나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서는 성경학자들이 정립한 성경연대기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야곱은 130세에 자손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고(창 47:9),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430년을 지내다가 나왔다(출 12:40~41). 출애굽기 12장 40절을 보면 ‘이스라엘(야곱) 자손들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까지 창세기 15장 16절에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출애굽 한 것이다.

출애굽 당시 홍해에 수장된 파라오에 관한 궁금증을 풀려면 우리는 출애굽 당시 모세, 아론과 담판을 벌였던 파라오가 누구였는가를 밝히면 된다. 그 강퍅한 파라오는 모세, 아론과의 10번째 담판에서 ‘죽음의 천사’가 파라오의 맏아들 투탕카멘의 목숨을 앗아간 이후에야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허락한 아멘호테프 Ⅲ세였다.

전 세계 언론 및 많은 국제기구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의 불똥이 중동의 장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란(페르시아)까지 확산되는 이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에 기독일보와 선교신문에서는 아마존에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 호평받는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인, 『Battle for the Firstborn』 번역본을 발췌해 소개하며 이스라엘 출애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그의 묘지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

아멘호테프 III세가 만든 조각상이 매우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수년 동안 볼 수 있다. 그의 초기 조각상에서 그는 거의 10대처럼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팽팽해지고 성숙해진 모습을 보였다. ©Wikimedia Commons- ArchaiOptix, British Museum

아멘호테프 III세의 묘지를 복원하기 위해 발굴하고 있던 와세다 대학의 한 팀이 중요한 증거를 발견했다. 벽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들은 투트모세 Ⅳ세 옆에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아멘호테프 Ⅲ세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와 같은 유형의 그림은 아멘호테프 Ⅱ세의 아마다 사원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와 투트모세 Ⅲ세가 같은 장면에서 동등하게 묘사된 것과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이 발굴은 이 발견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이나 이례적이었다. 그들의 결론은 그들이 공동 섭정이라는 것이었다. 대신, 나는 이것이 두 이름이 같은 파라오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 『KMT, Vol. 14, No. 4, Winter』, p. 9

파라오가 자신의 묘지벽에 다른 파라오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특히 아멘호테프 III세는 관대한 사람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그가 2개의 칭호를 가진 동일 인물이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믿는다.

어린이들

보통 여자아이만 기록하기 때문에 아이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4명의 딸이 알려져 있다고 믿어진다. 시타문(Sitamun), 헤누타네브(Henuttaneb), 이셋(Iset) 및 네베타(Nebetah)이다. 이 관행은 아마도 왕의 혈통이 파라오의 딸을 거쳐야 하는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적어도 두 명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내 생각에 크게 혼동을 준 문제이다.

공동 섭정 투탕카멘

어린 소년 투탕카멘은 8~9세의 아이로 공동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아주 어린 소년으로 그의 동상이 없다. 알려진 조각상에서 그는 아마도 12세 또는 13세에서 최대 18세 사이로 보인다. 그는 어린 10대, 아마도 17~19세에 사망했다. ©Mary Nell Lee

그가 황제 파라오가 되었을 때, 아멘호테프 III세는 그의 장남인 투탕카멘(Tutankamun)을 그의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이 어린 아들이 임명받았을 때 겨우 8~9세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명목상으로만 왕위에 올랐다. 그에게는 그를 대신하여 일을 하는 수많은 관리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 그의 아버지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피라미드의 영안실에 있는 메이둠(Meidum)에는 음각(陰刻) 그림이 있다. 그것은 아멘호테프 III세의 통치로부터 1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두 개의 기록물 중 하나이다.

“30년, 진실에 만족하는 아멘의 아들 이중왕 네브마트레(Nebmaatre)의 인격 아래, 거짓을 미워하는(?) 그를 사랑(?)하는 힘의 군주, 행복의 지배자 아멘호텝-헤카와셋(Amenhotep-heqawaset)이 남자를 의자에 앉게 한다. 그의 아버지 보좌와 그 기업의 땅을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낙서의 발견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일각에서는 이 파라오가 왕비를 통해 공동 섭정을 임명하는 옛 방식에 지쳤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투트(Tut)가 왕족이 아닌 아내 티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투탕카멘이 자신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III세를 위해 만들었다는 비문이 있는 솔렙 사자 중 하나이다. ©British Museum

그러나 많은 사람 사이에서 논쟁은 아멘호테프 III세의 이 아들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결론은 낙서의 아들이 아크나톤(Akhenaton)이라는 또 다른 아들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투탕카멘이 이 파라오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손자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학자들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한 투탕카멘 아버지의 신원에 대한 증거가 있다. 현재 영국 박물관에 있는 프루도(Prudhoe) 또는 솔렙 라이온스는 그 증거를 담고 있다. 원래 그들은 누비아의 솔렙 신전을 지키고 있었고 투탕카멘의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상하 이집트의 왕, 두 땅의 군주, 네브마레, 레의 아들 레의 형상, 테베의 통치자 아메노피스의 기념비를 복원한 자’

이것은 아멘호테프 III세(네브메어, Nebmare)를 투트의 아버지로 확고하게 구별한다.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은 자주 사용되는 아멘호테프 III세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은 아크나톤이라고 하지만 죔쇠에는 이름이 없다. 대신 투탕카멘이라고 제기한다. ©Louvre Museum

“아멘호테프 III세가 그의 테베 사원을 위해 주문한 조각상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tut’이다. 어근 단어는 ‘닮는다’와 ‘완성하다 또는 ‘완벽하다’를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조각상은 텍스트에서 ‘투탕크’, 살아있는 이미지(투탕카멘 이름의 일부, ‘아멘의 살아있는 이미지’)로 표현한 조각상으로 언급될 수 있으며 신중하게 고안된 신으로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신성한 본질의 그릇으로서의 형상은 그 안에 거하는 영과 그 안에 사는 영 모두를 인식할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완벽한 유사성’에 대한 강조는 상당했다.” 『Egypt’s Dazzling Sun, Amenhotep III and His World』, by Arielle P. Kozloff and Betsy M. Bryan with Lawrence M. Berman, p, 127

‘tut’라는 단어와의 이러한 연결은 그가 투탕카멘의 아버지임을 가리키는 또 다른 증거일 뿐이다.

그의 맏아들 이름에 파라오와 신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매우 자주 사용한 단어를 포함함으로써 아멘호테프 III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투탕카멘이 아멘호테프 III세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더 많은 증거는 룩소르 사원의 비문에서 발견된다. 그곳의 콜로네이드에는 투탕카멘에게 귀속된 비문 ‘그의 아버지, 네브마트레’ 즉 아멘호테프 III세를 가리킨다.

이것은 투탕카멘의 받아들여진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이론은 그가 실제로 그의 형제였던 아크나톤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투탕카멘의 어머니는 티예였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투탕카멘은 아크나톤의 아들이고 어머니 티예는 그의 누이 중 한 명이라고 한다. 학자들의 결론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연구 초기에 나는 모든 자료가 얼마나 혼란스럽게 나타나는지를 발견했다. 그러나 론의 이론을 적용했을 때 모든 자료가 응집력 있는 도형에 얼마나 매끄럽게 들어맞는지를 발견했다.

투탕카멘은 아멘호테프 IV세이다

아멘호테프 IV세의 상태에 대해 내가 찾은 모든 것은 이것이 아크나톤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대신 투탕카멘이 황제 파라오가 되었을 때 사용할 이름이 될 것이라고 제기한다.

나는 아멘호테프 IV세라는 이름이 포함된 모든 비문이 투탕카멘을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중에 왕좌를 차지할 그의 형제인 아크나톤으로 식별되는 것은 아멘호테프 IV세의 조각상과 이후의 아크나톤 조각상이 유사하다는 점에 근거한다. 어머니 가족 사이에는 강한 가족 유사성이 있다. 투탕카멘과 그의 남동생인 아크나톤이 서로 닮았다는 것만은 이치에 맞는다.

<왼쪽 위, 아래> 지금은 호렘헤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한때 아이(Ay, 달)라는 이름을 가졌다. <오른쪽> 나중에 두 명의 파라오가 빼앗은 메디넷 하부(Medinet Habu)의 17피트(약 5m) 투탕카멘 동상 ©Wikimedia Common- Einsamer Schutze, Wikimedia Commons- Marc Ryckacrt, Oriental Institute- Daderot

이 식별과 관련된 발견이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2013년에 보고되었다. 비지에-아멘호테프-후이(Vizier-Amenhotep-Huy)의 묘지에서 아멘호테프 III세와 아멘호테프 IV세의 이름이 같은 기둥에서 발견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멘호테프 Ill세의 공동 섭정 투트모세 IV세로 그의 즉위 해를 세는 통치 30년에 세드 축제가 시작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KMT, vol. 25 no. 2 Summer 2014』, pp 17-27

이것은 아멘호테프 III세가 황제가 되고 그의 아들을 그의 공동 섭정으로서의 투탕카멘을 지명한 해였다.

학자들은 이것이 아멘호테프 III세 및 아멘호테프 IV세 간의 공동 섭정의 증거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아멘호테프 IV세를 투탕카멘 대신 아크나톤으로 식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동의한다.

결론

티예는 아멘호테프 III세/투트모세 IV세의 아내이자 투탕카멘의 어머니였다. ©Snofru~commonswiki

나는 30여 년간 발굴한 자료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시기 파라오는 아멘호테프 Ⅲ세였다고 주장한다.

투트모세 IV세는 투트모세 III세(아멘호테프 II세)가 죽었을 때 아멘호테프 III세가 되었다. 그는 장남 투탕카멘을 공동 섭정으로 임명했다. 투트의 동상은 그의 미래 이름인 아멘호테프 IV세로 만들어졌지만, 그는 황제 파라오가 될 때까지 살지 못했다.

아멘호테프 III세는 나중에 아크나톤이라는 이름으로 파라오가 된, 적어도 한 명의 다른 아들이 있다. 그는 투탕카멘의 형제였고 그들의 어머니는 티예 왕비였다.

안케세나문(Ankhesenamun)은 젊은 투트의 묘지에서 그의 아내로 서술되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가 아멘호테프 III세이고 그녀의 어머니가 티예 여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투탕카멘의 완전한 누이일 것이다. <끝>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 번역: 리진만 선교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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