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9)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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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12-17
이희우 목사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임금이나 황제를 연상시키는 ‘교황’보다는 ‘교종’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사례가 늘었다고 하지만 둘 다 ‘교회의 으뜸’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도 하는데 이 호칭은 하느님의 모든 종들 중 가장 낮은 종이라는 것인지, 가장 으뜸이 되는 종이라는 것인지는 좀 혼란스럽다. 혹시 여전히 높아지려는 욕망이 반영된 호칭이라면 성경과는 거리가 먼 호칭일 것이다.

실제로 400여 년 전 로마 교황청이 유럽에서 갖는 정치적 권력이나 위상 때문에 동양인들이 황제급 지위로 받아들여 ‘교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 개회-1965.12 폐회) 이후 쇄신 작업을 하며 이 교황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는 주장도 제기 되었으나 여전히 사용되고 있고, 교황청은 지금도 가톨릭 최고의 통치기구이다.

물론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면서 행하는 의식 중에 사람의 발에 키스하는 의식이 있는데 요즘처럼 군림하거나 최소한 동등한 위치를 주장하는 시대에 노예처럼 다른 사람의 발에 키스하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은 낮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감동적인 의식이다.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세족식이라는 모범의 재연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셨던 세족식은 감동이라기보다는 충격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발을 씻어주신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정성을 다해 씻어주셨다.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것을 보면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몸으로 행하신 예식, 본문은 그 행함의 단초(端初)가 되는 말씀이다. 우리는 세족식이라는 예수님의 헌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표적의 책 후반부에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자’가 ‘자존심을 버리고 순종해 기적을 체험한 것’과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예수라는 그 사람이 앞을 보게 했다고 증거하는 고군분투’에 대해 나눴다. 그는 예수라는 분을 만난 것이 운명의 터닝 포인트였음을 알고 진실로 감사한 사람, 그는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 표적의 책은 10장에서 예수께서 당신이 선한 목자라고 I am을 말씀하신 것과 돌을 들고 치려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셨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상황이 되었음을 밝혔고(42절),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과 부활 영광을 예표하신 예수님을 소개했다. 그리고 결국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공회가 소집되고(47절),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었다(53절)고 했다. 또 12장에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고, 거기서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장례를 준비하는 듯한 일이 있었고(1-8절),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나사로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9-11절)이 되었다고도 했다.

이런 흐름 가운데서 본문은 마침내 다가온 유월절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사도 요한의 논리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한 터치가 돋보인다. 그 시작이 1절,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였다. 예수께서 당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아셨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만찬 자리에 앉은 가룟 유다가 이미 마음을 마귀에게 빼앗겨 예수님을 팔려는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도 알고 계셨다고 했다(3절). 주목할 것은 요한이 예수께서 아신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며 예수께서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기대대로 서로 발을 씻어주는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

너희 발을 씻었으니

발을 닦아 주는 것이 천한 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그래서 침례(세례) 요한이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발 씻기심을 단순한 헌신과 모범적인 봉사 개념으로 보면 안 된다. 만일 헌신, 모범적 봉사 개념으로만 보면 당시의 시대적 이슈들과는 무관한 성구가 되기 때문에 말씀의 흐름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냥 머리에 물을 뿌려주시거나 등목을 해주셨으면 시원했을 텐데 예수님은 왜 하필 발을 씻어주셨을까? 그것도 내일이면 죽음인데...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타락한 시대상과 관련이 있다. 예레미야 3장과 4장에 보면 요시아 왕 때부터 시드기야 왕 때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던 예레미야에게 심판의 메시지가 임했다. 이스라엘의 악과 반역, 그리고 유다의 타락상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예레미야서 3장에 기록된 말씀을 새번역으로 보면 “너는 수많은 남자들과 음행을 하고서도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려고 하느냐?”(1절), “저 벌거숭이 언덕들을 바라보아라 네가 음행을 하여 더럽혀지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느냐?... 너는 길거리마다 앉아서 남자들을 기다렸다”(2절), “너는 창녀처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3절),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은 끝없이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면서 온갖 악행을 마음껏 저질렀다”(5절)고 하신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래도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셨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3:7절), 하나님은 그들의 배신을 아파하신다(20절).

4장도 같은 분위기이다.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1절), “아이고 배야, 창자가 뒤틀려서 견딜 수 없구나, 아이고, 가슴이야, 심장이 몹시 뛰어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구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전쟁의 함성이 들려온다”(19절),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다. 옥토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땅의 모든 성읍이 주님 앞에서, 주님의 진노 앞에서 허물어졌다”(25-26절), “네가 망하였는데도, 네가 화려한 옷을 입고, 금패물로 몸단장을 하고, 눈 화장을 짙게 하다니, 도대체 어찌된 셈이냐? 너의 화장이 모두 헛일이 될 것이다”(30절).

구절마다 적나라한 지적, 참으로 기가 막힌 모습이다. 그런데 우린 다를까? 대형교회의 세습으로 얼마나 시끄러웠나? 또 국회는 성경적 신학교육과 The Way를 설교하면 범죄로 규정될 수 있는 악법이자 제3의 성을 명시한 악법임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고 한다. 다수로 밀어붙이는 악법 제정은 중단되어야야 한다. 국민의 심판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적 반역과 윤리적 타락의 현장에 분주히 달려가는 발이라면 그 발목을 다 분질러야 마땅한데 주님은 그 발을 씻어주신다. 죄와 관련된 발을 씻어주신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 빛나는 이유다. 우발적 행동이었을까? 아니다. 제자들이 반드시 따라 해야 할 본(本)이 되는 행동이셨다. 용서받을 만해서 용서하시고,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시나? 아니다. 잠언서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잠 6:16-19)라 했는데 그 말씀에서도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지적한다. 종교적 반역이든 윤리적 타락이든 그 죄악을 향해 달려가는 제1 원인자인 발! 그 발을 주님이 씻겨주신다. 용서요 사랑이요 감당치 못할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구속을 위한 파격적인 헌신이었다.

주와 선생이 되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그저 발 씻겨주는 의식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헌신이며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에게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14절), 예수님이 스스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라고 하셨다. ‘선생’은 종교지도자들을 존경하며 부르는 칭호, ‘랍비’(Rabbi)와 같은 말이었지만 ‘주’는 흔히 쓰는 용어가 아니다. 거의 신성(神性)의 맛을 풍기는 최고의 경칭(敬稱)인데 예수님이 이제는 스스로 이 칭호를 쓰신다. 이렇게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셨다는 말씀이다. 말이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기독교를 섬김의 종교라 하고, 사랑의 종교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다. 그렇다고 그저 강하고 무서운 분이 아니다. 권위적 형태로 지시하고 명령하실 분인데 호소하고, 섬겨주신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4-15). 마치 바람 난 아내를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남편 같은 모습이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창조주 하나님, 통치자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해 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섬김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도 막지 않으셨다. 얼마든지 천군 천사를 통해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않으신 것은 인간의 선택권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가진 것을 아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그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호소할 뿐 강제적으로 심판하거나 윽박지르시지 않았다. 유다의 생각이나 결정은 유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섬기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심지어 유다의 발까지도 씻어주신다. 종들이 하는 일인데, 종들이 상대방을 주인으로 대우해주는 것인데 예수님이 가룟 유다까지 그렇게 대우하셨다. 섬겨주셨다. 그야말로 끝까지 섬기는 리더십이었다. 성경은 말한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 발을 씻으라

예수님은 남의 발을 씻어줄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마치 주인이 자기 종인 것을 알면서도 그 종의 발을 씻어준 것과 같다. 신분이 어떠하든 남의 발을 씻어주는 행동, 그 행동이 복을 가져다줄 행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16-17절)고 하셨다. 제자들에게 ‘종들’이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일깨우시며 자신들의 고결을 내세우거나 겸손하고, 천한 임무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 절대 스스로 자신을 높은 자리에 앉히면 안 된다고 하신다. 한 마디로 섬기는 리더십을 강조하신 것이다.

군인 사회에서는 이런 리더십을 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권위적 리더십이라야 지휘가 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 대대장, 연대장이라 하면 권위 때문에 엄청 높은 어른이지만 사실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군목 시절 연대장이 너무 훌륭하셔서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했는데 연대장이 그때 43세이셨다. 요즘 부임하는 경찰서장들도 보면 10년 이상 어린 분들이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높아보이는 것은 계급사회 특유의 권위적 리더십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지휘관이 병사들 구두 닦아주는 것과 비슷한 일,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이다.

독일의 메르켈(Angelika Merkel) 전 총리를 기억하나? 2021년 12월 7일 퇴임했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최고의 지도자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섬기는 리더십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무려 4번 연임하고 16년 동안이나 재임했고, 4년 연속 포브스(Forbes)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였다. 종교에 냉담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목사의 딸이었으니 얼마나 불리한 조건이었나? 원래 전공도 물리학이었다. 양자 화학 분야의 박사였는데 헬무트 콜에게 발탁되어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 자연보호, 원자력부 장관을 지냈고, 2005년 11월 22일부터 독일 총리가 되어 독일을 이끌었다. 그에게 따라다닌 별칭은 ‘엄마(Mutti) 리더십’, 철저히 양극단을 배제하면서 화합과 포용으로 나라를 이끌었기에 붙여진 별칭이다. 이게 바로 발을 씻어주는, 섬기는 리더십, 그녀의 리더십은 이념 따지고 편 따지고 과거 따지는 권위적 리더십이 아니었다.

메르켈은 총리 재임 중에도 늘 동네 아줌마 같았다. 옷도 항상 똑같은 옷, 사람들이 왜 매일 같은 옷을 입냐고 물으면 “나는 패션모델이 아니고 공무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다. 돋보이려고 기 쓰지도 않았고, 경직되지도 않았다. 그저 타인의 발을 씻어주겠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섬기는 리더였다.

메르켈은 예수님을 본받은 삶을 살았다. 아마 목사의 딸로 자라며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몸소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를 높이셨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셨다. 단순히 섬기는 삶이 아니라 살리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안다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이기에 제자들은 물론 우리도 알고 있는 일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복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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