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십자가의 은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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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은혜란?

최더함 박사

그렇다면 정의와 은혜는 어떻게 자리잡습니까? 정의는 정의이고 은혜는 은혜인데, 죄를 지은 사람을 정의롭게 심판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용서해 준다면 정의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비한 역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의의 법에 따르면 한 사람도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받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더 난해한 문제는 죄를 지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죄를 도말할 저격과 능력이 있느냐 하면 전혀 그럴 자격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간은 지옥 심판을 받아 영벌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의 심판으로 멸망한다면 구원주가 왜 필요합니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는 주권을 가진 자가 베푸는 호의입니다. 은혜는 죄를 문책하고 재판권 혹은 심판권을 가진 사람이 죄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령, 열 명의 자녀가 범죄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재판장이 모두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이 가족의 대를 잇게 하려고 한 사람을 살려 보냈다면 그것은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정의의 법칙을 위배한 것이 아니라 넘어선 것입니다. 정의의 원칙으로는 열 명 모두 사형시켜야 하지만 재판장이 자신의 주권으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주권의 행사에 대해 다른 자녀가 나는 왜 살려주지 않느냐 항의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재판장에게 주어진 재량권입니다. 이웃집 사람이 나더러 당신은 왜 월요일 아침마다 청소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지 못합니다. 청소를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내가 결정할 권리, 즉 나의 주권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구원시키고 구원시키지 않는 결정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의 진술이 절묘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료”(롬 10:21~23)

한 마디로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요 그분의 선하심과 호의요 그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자비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에게는 가혹한 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비열함이나 원한이나 적의나 악의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향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친절함과 따뜻함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그분의 공의, 즉 정의로운 원칙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향해 여전히 공의를 유지하시면서 동시에 은혜의 마음을 잃지 않으십니다.

이런 은혜에 대해 성경은 다양한 용어와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먼저 히브리어 ‘헨’입니다. 이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를 뜻합니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할 때(창 33:8), 궁핍한 처지에 빠진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때(신 7:7~8), 사울을 피해 블레셋에 도착한 다윗에게 아기스 왕이 시글락 땅을 분배하고 호의를 베풀었을 때(삼상 27:5~7)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또 이것은 시시때때로 늘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낼 때 쓰인 단어입니다. 주로 이 단어는 시편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시편 기자는 외로움과 배고픔과 고난과 죄의 압박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이 은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근거로 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후회하고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언제나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음으로 히브리어 ‘헤세드’가 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인자하심으로 이 세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적용될 때 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로부터 한 민족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시고, 구원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누리며 구원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헤세드’ 때문입니다. 특히 ‘헤세드’는 ‘진실함’이라는 뜻의 ‘에메트’와 함께 시용됩니다. 이 에메트에서 ‘아멘’(믿습니다)라는 동사가 파생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헤세드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고백과 순종을 요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카리스’가 있습니다. 이는 ‘기뻐하다’는 ‘카이로’라는 동사에서 파생했습니다. 주로 이 단어는 신약성경 중 복음서보다는 바울서신에서 거의 2/3 이상 사용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그분의 사랑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서신서 모두에서 성도들에게 늘 ‘은혜와 평강’을 구하며 인사합니다(롬 1:7, 고전 1:3, 갈 1:3, 엡 1:2, 빌 1:2, 골 1;2 등). 이로 보건대 사도 바울의 가슴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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