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어떤 긍휼을 구하는가?

오피니언·칼럼
칼럼
박진호 목사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시26:1-3)

심한 고난이 닥칠 때에 저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그러면 안 되는 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은연중에 하나님께 불만과 의심을 터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충성했습니까? 헌금과 봉사도 힘에 부치도록 했지 않습니까? 남들에게 해악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이 어려운 형편에도 도와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고난이 웬 까닭입니까? 아무리 따져 봐도 하나님이 조금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만의 놀랍고도 신비한 뜻과 계획이 있는 줄 알고 또 당신만의 영광이 드러날 줄도 믿습니다. 그러나 제발 이 환난만 제거해주시면, 최소한 그 아픔만이라도 줄여주시면 어디가 덧납니까? 이런 고난이 없어도 저는 열심히 뜨겁게 잘 믿을 자신이 넘칩니다.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감히 이런 불평을 터트릴 수 있는 주된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알게 모르게 들고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끈질긴 자기 자랑입니다. 자신은 신자로서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큰소리치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이나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단지 고개를 숙였다는 겉모습과 큰 소리로 발설하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지금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완전함에 행하였고 요동치 아니했고 여호와를 의지했다는 점을 가장 먼저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호와께서 판단해 달라고 합니다. 나아가 살피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신이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거나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주께 간구했으며, 또 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완전함으로 행할 수 있는 성자(聖者)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의 완전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차원과는 달랐습니다. 바로 어떤 일이 닥쳐도 “요동치 아니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유혹과 이유 없는 고난 등이 자신을 넘어뜨리려 덤빌 때도 주님만 의지함으로써 요동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의 흔들림이나 두려움과 염려 등이 전혀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럴만한 철인(鐵人)도 이 세상에는 전혀 존재 하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흔들리기는 하되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일이 있어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 사람, 죄악, 환난 등과 인내하며 싸우는 동안에 온갖 상처가 생겨 도무지 볼품이 하나 없어져도 여호와의 손만은 절대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바로 그런 맥락에서 여호와께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사 자신을 단련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갖거나, 죄에 넘어가려는 순간에 자신을 붙들어서 다시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품성으로 자신을 채워주어서 추하고 더러운 일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또 환난을 당해 두려움과 염려가 생겨 주를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사람이나 자기 뜻을 좇으려 할 때에도 주께서 자기 마음을 단련시켜 주의 인자만 바라보게끔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고난을 당장 해결해 주거나, 최소한 강력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 기도의 거의 모두를 차지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의 전부가 그런 내용만 차지하고 있거나, 또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해도 그 수준에서 나아지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문제 해결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올바르게 바꿔주거나, 또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고난이나 문제나 영적성숙이나 간에 도깨비 방망이 뚝딱하듯이 기도만 하면 당장 다 깨끗하게 해결해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는 주님이 자신을 성숙시켜 주면 자기가 스스로 완전함에 행하여 요동치 않겠다는, 여전히 문제 자체의 해결은 주님께 달렸음, 것입니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11절)

우리나 그나 동일하게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긴 하되 그 긍휼의 내용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처지나 여건이 너무 힘드니까 불쌍히 여겨서 빨리 형통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고통 중에 있는 자신"에게 긍휼을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혹시라도 자신이 완전함에 행함에 부족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죄악과 고난 중에 “자꾸만 약해지려는 자신의 믿음”이 스스로도 너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다윗은 당장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여호와만 의지하려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난, 문제, 죄악이 닥쳐도 주님만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완전함을 바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시편의 결론을 어떻게 맺었습니까?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2절) 주님만 온전히 의지했더니 완전함으로 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탄은 안전하고 쉽다(safe and ease)는 뜻입니다 다윗은 당신의 멍에는 가볍고 쉬우니 당신께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면 “마음의 쉼”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그분 오시기 천 년 전에 이미 성취받은 셈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우리의 불평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이제 짐작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불경스럽게 감히 의심 불평한 것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위에 가끔 작은 선행을 의무적으로 보태는 정도가 신자로서 완전함을 행한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어떤 죄악과 위험이 닥쳐도 주님만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신자가 진짜로 완전함에 행하는 것임을 모르거나 잊고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인데 우리는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고선 당장에 힘들다고 하나님께 불평과 의심을 터트리기 바쁩니다. 나아가 자기의 의와 교환 조건으로 자신의 형통만 요구합니다.

신자가 정말로 주님의 완전한 긍휼을 구해야 할 때는 나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지 못할 때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만 온전히 의지하는 것만이 신자가 완전함으로 행하는 것이자 실제로도 완전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께 내세울만한 자랑거리가 내게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겨지면 아직도 완전한 신자가 되지 않았고 또 그분의 온전한 긍휼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환난을 아직도 해결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가 참된 믿음에 서지 않았고 거기다 그분께 참된 긍휼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11/7/24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