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초로 서구 문명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정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여태까지는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와 복수의 자녀로 구성되는 가정이 ‘정상’으로 통했으나 요즘 들어 이를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커졌다. 이제 그런 가정을 인간관계 기본 질서의 유일한 형태나 심지어 우월한 형태로 주장할 수 없게 됐다. 결혼과 가정을 보는 유대-기독교의 관점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제 그것이 개인 차원과 사회 차원의 인권, 자아실현, 실리 따위를 중시하는 일련의 가치관으로 다분히 대체됐다. 오늘의 세상에서 결혼과 가정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문명 자체도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문화적 위기는 뿌리 깊은 영적 위기의 증상에 불과하다. 한때 공유했던 사회적 가치관의 기초를 영적 위기가 계속 허물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과연 창조주 하나님이 결혼과 가정을 제정하셨고 사탄이라는 악한 존재가 세상에서 그분의 창조 목적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하나님이 제정하신 두 제도의 기초가 최근 들어 집중 공격을 당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 데이비드 존스 – 결혼과 과정
부활은 봄에 꼭 맞는 옷과 같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이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 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부활이라는 말 자체가 살아 있습니다. 부활은 한 번 살아나는 것을 넘어 생명의 영속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새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부활체는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 변하게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성에서의 삶은 부활체의 영화롭고 신령한 몸입니다(빌 3:21). 그래서 우리의 사모함은 단순히 천국 가는 것보다 예수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부활체의 특징은 부활하신 주님을 꼭 닮은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는 생명, 생명의 영원인 부활은 하나님만 하시는 것입니다.
홍동완 – 들풀 위에 깃든 마음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를 알아거려 하는 모습은 그래서 애처롭고 불안하다. 스스로를 모르는데 타인에게 나에 대한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뿌리와 토대를 모르는데 무엇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 혼자 상대방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상대의 입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듣는 것,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좋다. 그런 사람들은 귀하다. 수가 적어서 귀하고 가치롭기에 귀하다. 그런 귀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은 더 귀하다.
조봉제 – 보면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