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학교의 설립
하위렴은 처음부터 복음 사역 이상으로 교육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선교부 연례회의가 열릴 때마다 선교부 차원에서의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 사역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선교부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학교를 하나씩 시작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처음에는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이유로 다소 회의懷疑를 보이던 선교부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학교 설립의 책임을 맡겼다. 그는 1900년 레이놀드가 겨우 1명을 데리고 시작한 것을 하위렴이 맡으면서 8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는데 이것이 신흥학교의 효시가 된다. 교사는 하위렴과 데이비스였다. 개교 당시 상황에 대해서 하위렴은 1901년 7월 9일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온 소년들을 위해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학교를 여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모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하여 부모들은 학교가 시작하기 전부터 8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보내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있는 몇몇 어린애들도 있었다. 우리는 건물과 책 그리고 유능한 교사 등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1904년에는 교사校舍를 화산 스테이션에 있는 하위렴 선교사의 사랑채로 이전하고, 데이비스를 포함한 최중진, 김필수, 김명식 등 5명의 교사가 주 5일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을 진행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과 한글, 한문, 지리, 산수 등을 가르치면서 신흥학교는 전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1906년에 희현당 옛터에 한옥 건물을 신축해 독립된 교사校舍를 확보하고, 1907년 2월 랭킨Nellie Rankin이, 3월에는 교육선교사 니스벳John S. Nisbet/유서백 부부가 전주에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교육 선교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08년 9월 다시 8간의 교사校舍를 다시 신축하고, 니스벳이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교명을 신흥학교라 정했다. 새 여명黎明을 뜻하는 New Dawn의 한역韓譯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이 어두운 세상을 빛의 세상으로 바꾸자'는 의미를 담았다. 1911년 니스벳이 목포 영흥학교로 옮겨가기 직전에 신흥학교 학생 수는 이미 15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신흥학교 연혁을 보면 기록자에 따라 그 시작을 레이놀즈로 보기도 하고, 신흥학교라는 교명을 정식으로 사용한 니스벳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에버솔F. M Eversol이 언급한 기록에 의하면 선교부에서는 개교책임을 맡아 시작했던 하위렴을 설립자로 여겼다.
교육 선교에 대한 하위렴(1대)의 비전이 그 후로도 니스벳(2대)과 레이놀즈(3대), 에버솔(4대), 인돈(5대)으로 이어지면서 신흥학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야기를 돌려 하위렴 선교사가 뿌린 이 지역에서의 교육 선교의 씨앗이 어떻게 발아되어 결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아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최초의 신흥학교 학생이 된 김창국은 1884년 1월 28일 한의원 김제원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년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의 조모와 모친은 일찍이 테이트 양의 전도로 전주 최초의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조모와 모친을 따라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1897년 7월 17일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때 나이 13세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도와 장터에 나가 전도지를 돌리며 전도 활동에 힘쓰기도 했다. 1900년 하위렴이 시작한 신흥학교 최초의 학생이 되었고, 졸업 후 하위렴의 추천으로 평양 숭실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당시 평양 대부흥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은 그는 졸업하던 그해(1907) 평양신학교에 들어갔으며 그는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선교사들을 도우며 선교부 내 순회 사역을 돕기도 했다. 1915년 졸업과 함께 안수받고, 전주지부 내 최초의 한인 목사가 되었다.
1917년 전라노회에서는 그를 제주도 선교사로 임명했다. 그는 6년 동안 내도리교회, 삼양리교회 등을 개척해 제주도 복음화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 1922년에는 광주 남문밖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사역하다가 1924년 광주 양림교회로 분립해 나와 25년 동안 봉직했다. 한편 그는 전국각지를 돌며 102회 걸친 부흥회를 인도할 정도로 부흥사로서도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신흥학교는 그 후로도 발전을 거듭하며 수많은 목회자와 인재를 배출했는데 교계에서 활동한 인물로는 전주 안디옥교회와 바울선교회를 이끈 이동휘 목사, 서울신학대 총장을 지낸 강근환 목사, <사랑의 원자탄> 저자이자 기독신문의 전신인 <파수꾼>의 발행인 안용준 목사, 현대종교를 설립하여 이단과 맞선 탁명환 소장과 예장합동 총회장인 전계헌 목사 등 이름난 목회자들이 즐비하다.
이 학교 출신의 유명 인사로는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항일운동가로 활약한 작곡가 정율성, 민중신학의 거두인 서남동 목사, 서울대 교수이자 작곡가인 백병동 등이 있고, 하버드대 한인 최초 졸업생 하경덕 전 서울신문사 사장을 비롯해 거창고 교장을 지내며 참 스승 상을 제시한 전영창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세균 역시 신흥학교가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백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