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상사의 최고봉 어거스틴의 공헌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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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신학아카데미 자문위원)
김경재 박사

어거스틴은 2,000년 기독교 사상사 산맥 중 빼어난 고봉 같은 인물

이 칼럼은 평생 동안 성 어거스틴만을 연구하여 『시간과 영원』등 역저를 남기고 가신 선한용 교수(1932-2024)를 추모하면서 쓰는 글이다. 다만 이 칼럼은 왜 선한용 교수가 평생 어거스틴 연구에만 집중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어거스틴이 기독교사에 끼친 위대한 공헌점 핵심을 일별하고, 우리 시대에 보완할 점을 살피려고 한다.

어거스틴은 4세기와 5세기에 활동한 뛰어난 사상가이지만, 그의 영향은 중세기와 그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 훗설, 바르트, 틸리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넓고도 깊게 미쳤다. 이제 간략하게 살펴보겠지만 그의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이해, 시간과 역사 이해, 인간의 죄성과 은총 이해, 교회의 영성과 아가페와 에로스를 통합한 ‘사랑’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기틀을 놓았던 위대한 사상이다.

어거스틴은 4세기 중엽(AD. 354)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경건한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고대문명이 붕괴되어 가면서 중세기가 시작되려는 시대요, 점성술이나 선악이원론인 마니교, 영지주의, 철학적 회의주의가 팽배하던 세계관의 혼돈 시기였다. 사상적 방황 끝에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기도와 히포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신앙지도를 받고 회심을 경험하여 새로운 진리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오직 하나님과 영혼에 대하여만 알고 싶을 뿐이다.”

교부시대가 끝나가던 4-5세기에 출현한 천재적인 사상가 성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첫 출발점은 그가 체험하고 증언하는 ‘하나님과 영혼’에 관한 사상이다. 그의 천재성은 당시 모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여러 가지 문제와 씨름했지만, 진리 그 자체를 아는 일은 인간 ‘마음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는 영혼(靈魂)에서 ‘하나님의 직접적 현존’을 체험하고 고백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靈魂)이라는 어휘는 엄밀하게 말해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영원한 그 무엇과 시간적인 것이 접촉할 때, 신령한 불꽃과 광휘를 발하는 존재론적 사건이요 실존적 사태이다. 영혼(靈魂)은 한자어 그대로 ‘영(靈)과 혼(魂)’의 합성어인데, 영(靈)은 초월적인 신(神)이 인간 마음에 접촉하는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이고, ‘혼(魂)’은 ‘혼백(魂魄)’이라는 어휘에서 보듯이 ‘하늘적인 것과 땅적인 것이 결정체’를 말하는 한자(漢字)이다.

거듭 주목해야 할 점은 ‘영혼’은 소유 형태로 인간이 지닌 정신 능력이 아니라,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존에서 발생하는 사건적 실재라는 점이다. 그 사건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현존을 통하여 지속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인간이 지닌 실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우주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고 귀납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실재성을 논증하려는 일체의 ‘존재유비 신학’을 거절한다. 하나님 인식은 영혼의 지성소에 직접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자기 내어주심, 자기 알려주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자기에게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는 ‘선험적(a priori)인 존재 그 자체’이다.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하는 논쟁 자체를 가능케 하는 실재, 권투 시합이 벌어지는 링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신다”는 20세기 칼 바르트의 계시론적 신관은 성 어거스틴을 통해서 일찍부터 확립되었다.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 만들어내는 일체의 도그마적 신관은 우상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외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궁극적 실재’인 것이지 인간 인식론적 구도 즉 ‘주체와 객체’의 한쪽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영혼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성 어거스틴에 의해서 뚜렷하게 확립되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인식론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서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근위병이나 전문가가 되는 듯이 바리새적인 교만을 떠는 행태에 경종을 울린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 5:8)”만이 하나님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미래는 기대, 과거는 기억, 오로지 순간과 오늘만 사는 시간적 존재

성 어거스틴의 공헌 중에서 다음으로 생각할 주제를 칼럼자는 ‘시간과 역사’에 관한 그의 독창적 생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큼 인간 사유를 결정짓는 실재다. 사람은 유한한 인생을 살고 가기 때문에 낳고 성장하고 늙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이 증대할수록 인간은 시간적 존재라는 것과 시간은 ‘흘러가는 객관적 그 무엇’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보통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선입관은 잘못이라고 보았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가능성’이지만,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세계와 더불어 창조된 ‘피조물의 존재의 집’과 같은 것이다. 시간은 유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임시 하숙집이요, 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유한한 세계의 존재 형식’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성’ 뿐이다. 그런데 인간 마음 혹은 영혼이 기억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과거’라는 시간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또 기대와 희망이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는 순간순간이 있을 뿐이고 좀 더 길게 잡아 말하면 ‘오늘 하루’가 있을 뿐이다.

한국의 철학가 다석 유영모 선생은 자기 나이 계산을 연수로 말하지 않고 날짜로 말한 데는 깊은 의미가 있다. 교인들이 사랑하는 복음성가 가사 중에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의 삶의 자세가 본래 시간을 살아가는 더 옳은 자세인 셈이다. 어거스틴에 있어서 시간은 반복하거나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선물이고 엄숙한 것이다.

어거스틴의 시간 이해와 더불어 그는 인류정신사에서 ‘역사철학’에 대한 중요한 원형적 이론을 남겨주었다. 그 하나는 세계현실은 ‘신의 나라(Civitas Dei)와 땅의 나라(Civitas Terrena)’로 구별되는 상충하는 두 개의 나라가 서로 겨루는 현실이라는 이해이다. ‘신의 나라’ 특징은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땅의 나라’ 특징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 1서 2:16)이다. 어거스틴은 ‘신의 나라’를 교회공동체라고 보았는데, 현실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참다운 영적 교회’를 의미했다. 어거스틴은 인류 역사 전체과정을 7시대로 구분하여 목적지향적 역사관의 기초를 주었고, 루터의 두왕국론에도 큰 영향을 준 셈이다.

의지적 존재로서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 은총의 능력

마지막으로 살펴볼 어거스틴의 사상 중 중요한 주제는 인간심성론과 하나님의 은총능력이다. 어거스틴은 인간 정신 능력의 세 가지 특징인 감성, 지성, 의지 중에서 인간을 의지적 존재로서 강조한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은 본래 창조모습 중 ‘의지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로 본다. 소위 교리적으로 ‘인간원죄론’과 ‘의지의 노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죄인을 용납하는 사랑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어거스틴의 인간 심성론은 펠라기우스(360-420)와의 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펠라기우스는 요즘으로 말하면 인간을 이성적 존재,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 자유를 행사하고 책임지는 존재라고 이해한 사상가였다. 어거스틴도 역시 일반적 생활 속에서 인간이 ‘책임적이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점에서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입장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20세기 심층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나 칼 융이 말하는 인간 심층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습들을 의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인간무의식의 깊은 층은 표면적인 이성적 의식의 조절과 도덕적 절제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통찰인 것이다. 그것이 ‘리비도’라고 부르든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하든 용어가 중요하지 않다. 죄성은 무지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의지적 반란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자기가 존재하는 것들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교만(휴브리스), 불신앙, 무한한 탐욕으로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영혼과 정신의 신학이지 ‘몸의 신학’이 아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몸’의 실재성이 지닌 엄숙한 실재성을 육체의 범주로 축소시킨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모든 신학자는 시대의 자녀로서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으며, 완전한 신학이란 지상에는 없다. 우리는 모두 어거스틴의 학생들인 것이다. 작고하신 선한용 교수는 위대한 어거스틴 사상을 한국 교계에 알리는데 평생을 바쳐 공헌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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