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한국교회 안에는 이상한 풍조가 하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얼버무리면서 어지간한 잘못도 모른 체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저 은혜로 덮어두자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곡해해 피차 사랑의 빚은 얼마든지 져도 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댑니다.
은혜란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자격과 조건이 안 되며 도리어 죄와 허물이 많았음에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해 주신 것이 그 핵심입니다. 구원 후에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 있지만 사랑으로 감싸 안아서 거룩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순전히 인간적 필요나 근거로 은혜라는 단어를 너무 남용합니다. 조금만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확실치 않음에도 무조건 은혜입니다. 반대로 형통은커녕 고난 중에 있어 불만이 가득한데도 그 의심 내지 불신을 감출 목적으로 “그저 은혜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니까 거죽만 종교적 용어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같은 죄에 찌든 인간끼리는 비록 담임목사라고 해도 죄를 사해주는 은혜를 베풀 수는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한 어떤 잘못도 하나님께 나아가 철두철미 회개하여 그분으로부터 용서 받는 절차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은혜란 본인의 철저한 깨어짐과 낮아짐의 바탕 위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생생하게 체험한 후에라야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정녕 상대의 잘못을 사랑으로 용서하려면 그냥 은혜로(?) 덮어두어선 안 됩니다. 용서란 잘못을 청산하는 절차로 그쳐선 많이 부족합니다. 그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지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배상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교회를 향해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개선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에 불과합니다. 은혜로 덮자는 것은 이런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물론 사안과 사람에 따라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주는 것이 본인의 회개와 개선에 더 도움이 될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사전에 엄연히 잘못인줄 알고서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 불법을 마땅히 용인해주어야 한다고 믿거나 기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관행인데도 고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계속 행합니다. 예컨대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선교비 명목으로 비싸게 강매(?)하거나, 교회법은 물론 상식마저 위배되는 담임목사나 당회의 탈법적 교회운영과 재정처리를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는 것들 말입니다.
빚(負債, debit)이란 어떤 재화나 용역을 제공받았기에 그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붙여서 반드시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되돌려 받을 생각이 전혀 없이 주는 것은 선물입니다. 본문의 우리말 번역이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하니까 마치 꾸어 받는 채무자의 입장에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는 식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의 빚은 성도라면 누구나 져야 하는데 그 빚은 되돌려 받을 것이 있는 부채라는 의미가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의무나 책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능동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이 채무라는 뜻이라면 사실상 모순된 말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을 주면서 되돌려 받을 의도가 있다면 참 사랑이 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은 서로 사랑만 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행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은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이 그분의 계획을 족집게처럼 미리 알아맞히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만사를 통치하는 유일한 근거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케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맛보게 하고 또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자들에게 신자더러 그 사랑을 소개하고 함께 나누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본문은 신자로서의 다른 의무나 책임은 안 해도 되지만 사랑 하나만은 꼭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선한 일들을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일들도 사랑의 바탕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다른 계명들도 자연히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차 사랑하면 율법을 다 이룬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9,10절)
간음은 이웃의 아내, 살인은 이웃의 생명, 도적질은 이웃의 재물, 탐내는 것 모두가 이웃의 것을 뺏으려는 죄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자연히 그 모든 죄에서 해방됩니다. 역으로 따지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모든 죄에 다시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도덕적 종교적 금령(禁令)만 위반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집중하는데 오히려 사랑하는 일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이 사실은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 목적도 신자의 행동에 제약을 두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껏 사랑하면 오히려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서 이웃의 아내, 재물, 인격, 생명 등 그 어느 것 하나 탐하지 않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만 베풀고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아무 시기, 질투, 쟁론, 분쟁, 다툼이라곤 없을 텐데 은혜로 덮고서 쉬쉬하고 넘어갈 일은 아예 생기지도 않을 것 아닙니까?
신자가 무의식중에, 잘 몰라서, 무엇보다 이전의 습성이 남아서 죄를 지을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이전의 습성대로라면 때로는 빤히 죄라는 것을 알고도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나쁜 죄가 있습니다. 용서 받을 수 있음을 전제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경찰서장이 아버지이기에 마음 놓고 비행을 저지르는 철딱서니 없는 소년과 같습니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계속 거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율법은 사랑이고 복음도 사랑입니다. 그 둘 사이에 상충하는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이 둘을 자칫 잘못해석 하면, 다른 말로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여기면 이단에 빠집니다. 복음의 무한한 사랑만 강조하면 방탕한 퇴폐주의로 흐르며, 율법의 공의와 경건만 강조하면 엄격한 도덕주의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강령이자 참된 복음입니다. 교회 안에 피차 사랑하는 일만 있다면 은혜로(?) 쉬쉬할 여지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부모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가 사람의 관심을 끌려고 짐짓 잘못을 범하는 것은 이해하고 용서해줄 여지가 다분합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무조건적 은혜로 용서 받은 위에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 줄 알게 된 신자들이 은혜를 전제로 죄를 짓는 것은 변명의 여지라곤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반 신자를 양육한 책임을 맡은 교회 안의 중요 직분자들이 용서해주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선이라고 여기면서 잘못된 관행을 계속한다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나아가 앞에서 말한 대로 이단에 빠진 것과도 같지 않습니까?
2012/4/19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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