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인가? 그냥 믿음을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바울이 믿음을 가르치는 데 소극적이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면 성령님의 마법과 같은 손길이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에게 교회에 대해 가르칠 때 기도회를 인도했다. 그는 편지를 써서 기도한다. 에베소서 1-3장의 45퍼센트가 바울의 기도이다. 기도와 설교가 거의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에베소 교인들을 단순히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예수님의 불꽃’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이 교회의 삶을 살고 있다. 놀랍게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글에는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에 있다. 우리가 교회의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기도의 중심에 둔다.
폴 밀러 – 우리 교회는 기도합니다
수없이 많은 실망의 계곡을 건너지 않고 희망의 정상에 이른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건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도 넘어뜨리지 못한다. 평생 먹구름 아래 사는 사람도, 일생 뙤약볕 아래 사는 사람도 없다. 반드시 시간은 지나가고, 언제나 끝은 다가온다. 마라톤의 가치는 우승보다 완주이고, 인생의 의미는 성공보다 공생이다. 월요병은 없다. 다만 하고 싶지 않은 일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은 마지막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결정한다. 높은 산 정상에서 보물을 캔 사람은 없다. 보물은 언제나 낮은 곳 깊은 땅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게 하고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능력이다. 눈물로 뿌린 씨앗, 땀으로 뻗은 가지, 인내로 핀 꽃, 다 아름답다. 그러나 꽃이 지고 맺힌 열매, 더 아름답다.
조정민 – 짧게 말해 줘
우리의 복된 주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놀라운 방법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깨어 계시거나 염려하시지 않았다. 잠을 주무셨다. 주님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위대한 보호자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집을 지키기 위해 경비원을 고용해 놓고도 도둑이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경비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과연 고용할 필요가 있을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55:22). 짐을 지고 있다면 주님께 맡겨라. 그 짐을 직접 짊어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실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모든 염려를 내려놓아야 한다. 예수님이 조용히 배의 고물로 가셔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 것처럼 말이다.
찰스 스펄전 – 나를 죽이고 예수로 사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