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7)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왔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12:44-50
이희우 목사

근래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심판’인 듯하다. 정치적으로 그만큼 안정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요란한 아우성인 심판 주장이 이중잣대(double standard)이자 내로남불이라는 데 있다. 세계적으로는 기후 재앙으로 곳곳에서 난리다. 신자들은 이 기후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불신자들은 이 기후 재앙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인류에 대한 심판, 자연의 반격으로 생각한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든 심판과 연관이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성경에서도 ‘심판’은 키워드 중 하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47절)이라고 하셨다.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관한 본문이지만 ‘심판과 구원의 이중주’로 보인다. 우리는 심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지만 초점은 구원에 맞추며 은혜를 누려야 한다.

심판이 있다는 말씀

심판이 없다가 아니다. 48절에 보면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고 하셨다. 말씀이 심판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대중설교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12장까지를 마무리하는 말씀인데, 이제까지 예수께서 말씀한 것을 믿거나 지키면 생명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이 표적의 책 결론이다.

그런데 말씀이 심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책, 『교회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양태를 지닌다고 했다. 첫째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 바르트는 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 둘째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 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문자적 증언이다. 이어서 셋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설교라고 했다.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결국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1절과 14절에도 보면 요한은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라고 했다. 그렇다면 말씀이 심판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지만 심판에 대해서도 말씀한다. 요한은 심판의 이유는 빛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한뿐만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기억하나? 의인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아니 단 10명이 없어서 어둠을 좋아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심판당하고 말았다. 빛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 때문이다. 사위들은 하나님이 성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장인 롯의 말을 농담으로 받았고, 당사자인 롯도 천사들이 재촉할 만큼 지체했다. 그만큼 죄가 가득했다는 뜻이다. 다행히 롯과 두 딸은 산으로 피하지만 그것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불로 임했다. 까맣게 타고 만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했던 폼페이도 최후의 날을 맞았고, 그토록 막강했던 로마제국도 사라졌다. 절대권력에 맞서던 검찰총장이 현재의 대통령이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 취급하면 안 된다.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다 보면 500미터 앞에 또는 1키로미터 앞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몇 번 볼 정도로 설치해놨지만 안 보거나 못 보거나 무시한 사람은 결국 찍히고 만다. 그렇게 안내표시판이 많은데도 찍히는 사람이 꽤 많다고 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수도 없이 심판이 있다고 경고한다. ‘심판’이라는 단어만 228회, 그 중 신약에 99회, 요한복음에만 20회, 신약 전체의 1/5 분량이다. 이 분량은 공관복음서를 다 합한 16회보다 더 많은 분량이다. 심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은 심판 내용도 많다면 심판이 있다는 경고는 훨씬 더 많아진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 심판 장면이 창세기 3장이다. 이 장면은 성경에 나오는 첫 심판 장면이기도 하다. 창세기 2장에서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17절)고 하셨는데 불순종한 것이 심판을 불렀다. 꼬드긴 뱀은 원래는 그때부터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을 것이라 했고, 여자와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과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했으며,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고 남편이 여자를 다스릴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 했다. 아담도 마찬가지, 평생 수고해야 땅으로부터 소산을 먹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땀을 흘려야 먹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죽을 것이라며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 하나님이 하신 엄청난 심판이었다.

결국은 죽음, 여기서부터 인간의 절망이 시작되었다. 진시황이 찾아다녔다는 불로장생의 영약은 없다. 성경은 창세기 3장 24절에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배치해서 막으셨고, 화염검, 곧 불칼을 두어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러면서 주신 심판 말씀이 많다. 기억하라. 심판의 날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다(49-50절). 그 이유는 누누이 강조했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의 하나됨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라고 하셨다(44, 45, 49).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주체성이나 개성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찾으신 것이다. 그래서 누누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라고 하신다. 자기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고, 언제나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 그런데 예수님도 영화로운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은 인생을 자기 생명에 충실하고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으셨다. 그래서 잘 보면 자기 말과 하나님의 말씀이 구분이 없다. 그저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는 것, 그게 목적이셨다. 그런데 그게 예수님의 생명을 더 충만하게 만든다. 기억하라.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살리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

요한복음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47절)라는 말씀이다. 죽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3장에서도 이미 밝히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이걸 요한1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심판을 원치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요한이 하나님께 붙인 이름이 바로 ‘사랑’이었다.

앞에서 창세기 3장의 첫 심판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만 하셨나? 그건 아니다. 은혜도 베푸셨다. 바로 죽였어야 했지만 죽음을 유예시켜 주셨는데 이것은 3년 동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 1년의 생명이 더 연장된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창세기 3장의 “너희가 결코 죽지 않으리라”(4절)라고 하신 말씀은 뱀의 유혹이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선악과를 먹고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사단이 맞고 하나님이 틀리셨나? 아니다. 시험 푸는 과정을 맞게 잘 풀다가 마지막 답 쓰는 단계에서 틀리면 정답인가? 오답인가? 당연히 오답, 결과가 틀리면 틀린 거다. 인간은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 죽음이 미래의 사건이라기보다 언제나 바로 곁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틀리신 것이 아니라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거다. 하나님은 바로 죽게 하시지 않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기억하라. 우리는 이미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지금은 집행만 유예된 존재다. 그리고 연장만이 아니라 사면 복권의 길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도 될 수 있고, 영생 복락의 길도 활짝 열려 있다. 예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요한은 노아의 8식구를 물 심판으로부터 건지시고, 유황불로부터 롯을 건지시고, 갈대아 우르, 우상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을 건지시고, 하란에서 야곱을 건지시고, 애굽의 노예와 남의 종 노릇하는 데서 요셉을 건지신 하나님,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여리고에서 기생 라합을 건지시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 하만에게서 고통당하는 모든 유대인을 건지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유대인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모든 죄와 멸망에서 건지는 하나님이심을 천명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가둔 무지를 몰아내는 진리의 빛, 모든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판단의 빛, 절망을 희망으로 돌려놓는 변화의 빛, 불행을 행복으로 뒤집어놓으시는 권능의 빛, 죽음을 생명으로,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빛으로 오셨다. 그 예수님이 선언하셨다. “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왔다”, 구원함을 얻은 감격을 누리며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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