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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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목사(세인트하우스평택)
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필자의 어머님이 소천하셨다. 89세를 일기로 새벽 3시경 요양병원에서 조용히 운명하셨다. 자식들 중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님은 그렇게 우리 곁을 홀로 쓸쓸하게 떠나셨다. 혼자서 병상에서 맞이하는 최후의 심경이 어떠하셨을까?

어머님은 우리 형제를 낳아주신 분이 아니다. 필자의 아버님과 재혼하여 우리 어머님으로 사셨다. 4남 1녀 우리 형제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님은 50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새 어머님은 아버님과 43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다.

필자의 형제들은 이번 장례식을 통해 새 어머님의 유지와 삶의 모본을 배웠다. 먼저 당신의 수한이 다해 가는 것을 아시고 친정이 불교 가문이지만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하라고 친정 쪽에 통보를 하셨다. 또 그동안 자녀들이 보내드린 생활비를 절약해 요양병원비를 지불한 나머지를 모아 장례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친정 조카에게 일임하셨다.

새어머님은 조용한 성품과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해맑은 분이셨다. 필자는 평소 어머님의 요구나 필요를 채워드리는 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수술 때에도 진해와 창원으로 내려가야 했다.

필자의 조부님은 30대 초반에 진주 지식인과 학생, 농민과 노동자 대표들과 삼일만세운동을 모의하고 1919년 3월 18일 장날에 거사를 했다. 조부님은 독립선언문을 경성에서 비밀리에 숨겨와 동지들과 함께 프린트하고, 태극기를 은밀하게 만들어 배포하고 앞장서 시위하다 주동자로 체포당하셨다. 조부님은 진주에서 알려진 대부호 집안으로 출옥 후 가산을 몰수당하고 멸문지화를 겪자 병고로 해방 전에 작고하셨다.

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진주만세 사건 판결문을 형이 공직자여서 기어코 찾아내었다. 그 외 자료 수집을 위해 필자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진주지방 독립운동사를 발견해 조부님의 존함을 찾아내었다. 그동안 가족들의 구전으로 전해져 온 독립운동 증빙자료를 찾아내어 너무 기뻐했었다.

이를 정리해 보훈처에 공적서를 제출했다. 드디어 조부님은 늦게 사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후 진주 공동묘지에서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로 이장을 했다.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현충일 전후에 날을 잡아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을 찾아 추모예배를 지금까지 드리고 있다.

새 어머님은 이런 집안의 내력을 자랑스러워하셨다. 아버님은 생전에 유공자 후손으로 힘겹게 살아오셨지만 긍지를 잃지 않으셨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상범의 자녀라는 딱지가 붙어 취업의 제약이 많아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해방 후 맨주먹으로 귀국해 극장 대형 간판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셨고, 그 후에는 간판업을 하면서 우리 형제를 고등교육까지 받게 했다.

문상 온 어머님의 친정 유가족들은 고마웠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대수술 몇 차례와 요양병원에서 마지막 삶까지 섬겨준 일을 감사해 하셨다. 우린 당연한 도리를 한 것뿐이었는데‥

새 어머님은 당신의 소원대로 아버님과 생모님이 안장되어 계신 공원묘역 납골당에 모셨다. 유골 봉안을 마친 후 우리는 아버님과 생모님 산소에 올라갔다. 묵념과 필자의 기도로 집안 대사 유종의 막을 내렸다. 역경의 세월을 살아온 선조들의 아름다운 유산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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