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하나를 시청했다. 충격적이었다. ‘신뢰’가 무엇인지를 그보다 더 잘 말해주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언덕 위에서 아래에 있는 아빠에게 몸을 던져 안기는 장면이었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뛰어내리기 무서운 높이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참 아래에 있는 아빠를 향해 몸을 던진다.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우선 아이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아빠에게 몸을 맡겼다. 두려움이나 의심 같은 기미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둘째로 아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려서 아빠한테 안긴다. 아빠 품에 완전히 안기기까지의 모습에서 전적인 신뢰를 엿볼 수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는 아이의 모습에서 ‘신뢰란 바로 저런 거구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 사랑하는 아빠 외에 다른 건 전혀 보지 않는 상태, 그것이 바로 '신뢰'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아빠 품으로 뛰어드는 아이의 모습에선 두려움이나 불신의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는 반면, 그 영상을 지켜보는 내겐 아찔한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칫 잘못해서 아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놓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의 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가 실수를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식이라 하더라도 인간 부모는 완전하지가 않다.
아이를 받다가 눈을 찌르거나 아니면 놓쳐버려서 불구가 된 경우를 여럿 알고 있다. 삼하 4:4절에 보면 유모가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요나단의 다섯 살짜리 아이 므비보셋이 떨어져 절름발이가 된 얘기가 나온다. 안고 가다가도 유모가 실수해서 다 큰 아이가 불구가 되는 일이 일어나거늘, 그 높은 언덕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안다가 아차 하는 순간이면 큰일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인간 부모에겐 그런 일이 가끔씩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런 염려가 도무지 필요 없을만큼 완전하시고 온전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신뢰하지 못한 채 불순종하고 만다. 창세기 12, 15, 16, 17, 18장에서 아브라함의 연속적인 불신과 그로 인한 불순종의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하지만 창세기 22장에서는 이전과는 판이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처음으로 전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단호한 마음으로 명령에 순종하려 했으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에 걸쳐서 하나님을 다급하게 만들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이 산에 올라갈 때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 이삭을 자기 손으로 죽이면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올라갔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삭이 약속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신뢰가 생겨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히 11:19a절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못 한 채 불순종하고 말았지만, 여러 번에 걸친 하나님의 참아주심과 약속 재확약 시켜주심에 따라 그 믿음이 조금씩 자라서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드디어 그 신뢰의 절정을 보게 된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신뢰 못 했다면 아브라함이 집을 떠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백 세에 아들을 얻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것도 기적같은 일이지만, 그 아들을 칼로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그에 못지 않은 믿을 수 없는 큰 기적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만큼은 그걸 신뢰하고 순종하려 했다. 완벽한 신뢰와 그에 따른 온전한 순종의 모습이다.
오늘 내겐 그런 신뢰함이 있는지 점검해보자. 영상에서 본, 아빠를 향한 아이의 신뢰함과 창세기 22장에서 확인한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신뢰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