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8.15 통일 독트린’, 북한의 변화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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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3대 통일전략을 담은 ‘8·15 통일 독트린’을 발표하고 남북 간 대화 협의체를 제안했다. 긴장 완화를 포함해 경제 협력, 인적 왕래, 문화 교류, 재난과 기후 변화 대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안을 다루자고 했는데 이에 대해 북한 측은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 민주 통일이 완전한 광복의 실현”이라고 전제한 뒤 △자유 통일을 추진할 우리 내부의 자유 가치관과 역량 배양 △북한 주민의 통일에 대한 열망 촉진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지지 확보 등 3대 과제를 제시했다. 그런 뒤 ‘8.15 통일 독트린’이 자유가 박탈되고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기를 희망했다.

윤 대통령이 밝힌 ‘8·15 통일 독트린’은 지난 2022년 광복절 경축사의 연장이다. 당시 윤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핵·미사일 개발 중단과 실질적인 비핵화를 전제로 다양한 경제 협력 방안을 제시한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이번 ‘8.15 통일 독트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유를 앞세운 새 통일 담론을 제시한 데 의의가 있다.

윤 대통령이 제시한 통일 담론은 북한 주민을 변화시켜 자유 민주 통일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6.25 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된 현실에서 자유 민주주의에 깊이 뿌리내린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이뤄 이제 북한을 통일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녹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호응이다. 북한 김정은은 올 초 느닷없이 선대 김일성의 유지인 한반도 적화통일 포기선언을 했다.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과 같은 표현을 헌법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한 후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했다. 그런 북한이 윤 대통령의 제안에 당장 호응해 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정은이 북한 헌법에 명시된 통일을 삭제하라고 지시한 건 남북 간의 체제경쟁에서 사실상 패배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북한 주민들이 통일의 기대감을 계속 유지할 경우 언젠가는 남쪽에 흡수 통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8.15 통일 독트린’ 구상과 함께 남북 간 대화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지 닷새가 지나도록 북한은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고 있다.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을 때 강한 비난과 함께 즉각 거부 의사를 밝혔던 것과 대비된다.

하지만 이를 윤 대통령의 제한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하긴 어렵다. 이번 윤 대통령이 발표한 ‘통일 독트린’에 대해 우리 정부가 북한 측과 사전에 아무런 교감이 없었고, 북한도 지금 시점에서 우리 정부와 대화 채널을 가동한들 실질적으로 얻을 이득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은 최근 큰 수해를 입은 북한 주민의 민심 이반을 막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지난 8~9일 평안북도 의주군 수해지역을 찾은 김정은은 천막으로 만든 임시거처에서 지내는 이재민들을 위로하고 재해 복구를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평안북도·자강도·양강도 수해와 관련해 어린이와 학생, 노인, 환자, 영예 군인 등 취약 수재민 1만 5400여 명을 평양으로 데려가 돌보겠다고 말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연일 ‘애민 지도자’ 이미지 부각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북한은 이번 홍수로 수천 명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언론과 외신이 이번 수해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을 보도하자 북한 당국은 ‘날조’라며 비난했으나 심각한 상황은 이미 중국 등 접경지에서 파다한 소문으로 퍼진 상태다. 북한 김정은이 연일 수해 현장을 찾아 주민을 돌보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홍수 피해로 더욱 흉흉해진 민심 이반과 이에 따른 내부 동요를 막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해 말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최근 휴전선 일대에 지뢰를 매설하는 등 ‘통일’이 아니라 ‘분단’을 강화하는 데 더욱 힘을 쏟는 모습이다.

그런 북한을 향해 ‘통일 담론’을 주제로 한 대화 제의가 먹혀들겠냐며 윤 대통령의 제안을 평가절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통일에 소극적일 순 없지 않은가. 자유 민주 통일은 우리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상과제란 점에서 북한이 통일을 거부할수록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북한 김정은을 불편하게 해도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통일은 어떤 경우에도 회피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이지만 담론으로 그친다면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 그건 북한의 내부 변화에 달려있을 것이다. 북한이 거부해도 정부가 계속 제안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정부가 북한 홍수 피해 지원 의사를 밝힌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린다고 북한이 당장 문을 열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두드리는 일을 포기해선 안 될 것이다. 노력과 시도 없이 북한을 대화와 변화의 장으로 이끄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고 나아가 통일에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