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념 정쟁화로 빛바랜 79주년 광복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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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주관한 제79회 광복절 기념식이 광복회와 민주당 등이 헌정 사상 최초로 불참하면서 역사적인 국경일 행사마저 정치적 셈법에 휘둘리는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제 광복절 79주년 기념식은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으로 구성된 단체인 광복회와 민주당 등 야당이 참석을 거부해 반쪽 행사로 치러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 독립기념관 관장이 건국절 논란의 중심에 있는 ‘뉴 라이트’ 인사라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인데 임명 철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끝내 불참한 것이다.

논란의 당사자인 김형석 관장은 광복회의 주장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김 관장은 지난 13일 CBS 라디오에서 “나는 건국절 제정을 반대하는 사람이고, 건국절을 주장한 뉴 라이트와도 관련이 없다”고 반박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을 ‘친일 프레임’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앞서 이종찬 광복회장은 정부가 건국절을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윤 대통령의 역사관과 건국절 이념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직접 건국절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과 김 관장의 해임, 두 가지를 8.15 광복절 기념식 참석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광복회가 점화한 건국절 논란에 야권도 총력 공세에 나선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은 지난 12일 국회 의안과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철회 촉구결의안’을 제출하고 이 사안을 쟁점화 하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대통령실은 이런 주장이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정부 차원에서 건국절 제정을 추진할 의사가 전혀 없는데 대통령에게 약속을 하라는 것 자체가 뜬금없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도 난데없는 이념 논쟁에 “먹고 살기 힘든 국민에게 건국절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유감을 표했다.

건국절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기정사실화하면서 논란이 크게 일었다. 여당이 법제화에 나섰으나 진보진영의 반발에 막혔다.

최근 들어 보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건국절 논란이 재 점화됐다. 보수권은 올 초 전국 극장에서 상영돼 큰 반향을 일으킨 다큐 영화 ‘건국전쟁’을 계기로 자유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반드시 건국절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끊임없이 제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요구에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도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사회적 합의가 우선인 건국절 제정 논란이 자칫 국민 통합의 저해 요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광복회와 야권이 8.15 기념식 참석을 놓고 친일 프레임 공세를 이어가는 건 이념 정쟁을 부추길 의도가 아니라면 납득이 안 된다.

사실 광복회가 김 관장을 ‘뉴 라이트, 친일파’ 등으로 매도한 배경이 있다. 그가 과거에 “친일파로 매도된 인사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서겠다”고 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런데 김 관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류가 있고, 잘못된 기술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서도 안 되겠다는 취지이지 친일 행위를 옹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친일인명사전’은 구체적 친일 행적이 확인된 좌파 인사들은 명단에서 빼고, 우파 인사들은 특정 조직·부대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 낙인을 찍는 등 2009년 출간 때부터 편향성 시비에 휩싸였다. 이걸 바로잡을 필요성 있다고 한 말을 꼬투리 잡는 건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선 대통령이 광복회가 추천한 인사 대신 보수 성향의 김 관장을 독립기념관 관장에 임명한 것에 대한 불만 표시라는 지적이 있다. 독립기념관 관장이 광복회가 추천한 인사들이 돌아가며 맡는 자리라는 공식이 깨지자 뉴 라이트, 친일 프레임 공세로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일개 단체가 대통령의 인사권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시점을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보느냐, 1948년 정부 수립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역대 정권 뿐 아니라 정치권과 학계, 종교계 등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돼온 문제다. 보수권은 해방 후 국민이 뽑은 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해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으니 이 날을 건국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나 독립운동 단체와 진보 진영은 1948년 건국절 제정은 일제강점기를 합법화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건국절 논란은 양 극단으로 맞서 있다. 그런데 이 사안은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은 틀리다는 흑백논리로는 영영 해결할 수 없다. 서로의 입장과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채 논란이 있을 때마다 극단적인 정쟁과 공격의 수단으로 삼으면 결과적으로 건국일도 없는 나라라는 불행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광복회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 인사들의 후손이 그 정신을 보존하고 기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이런 단체에서 자신들이 민 후보가 탈락하자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8.15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느냐 마느냐와는 완전히 별개 사안이다.

대통령에 대한 인사 불만을 건국절, 뉴 라이트 매도 공세로 확산시키고 8.15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한 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식의 분열은 조국 광복을 바란 독립지사들의 뜻과도 멀고 광복절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