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와 결혼
군산에 부임한 데이비스와 전주에 부임한 하위렴이 만나 결혼하게 된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아 소개하기로 한다.
남장로교 내한선교사로 조선 땅을 제일 먼저 밟은 데이비스는 1862년 버지니아 아빙돈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3살 되던 해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아버지를 잃고 신앙심이 깊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장로교 가정의 경건한 분위기 자란 데이비스는 어려서부터 오지의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했는데 그녀의 나이 29세에 때마침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자 데이비스는 조선 선교사를 지원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오지 선교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가 조선에 도착한 이듬해인 1893년부터 1896년 11월 군산에 부임하기 전까지 약 4년 동안 데이비스는 레이놀즈와 함께 인성부재 채플을 이끌며 어린이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1896년 11월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자신의 임지가 군산으로 정해지자 그녀는 곧바로 군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한편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남도 탐사를 마친 하위렴 역시 전주로 그의 사역지가 결정되면서 1896년 11월 하순 전주에 부임했으나 짐도 풀기 전에 전킨 선교사로부터 군산 스테이션에 내려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교 준비 관계로 드루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거였다.
남자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스테이션의 관리는 물론 2살짜리와 생후 6개월 된 갓난애가 딸린 메리를 포함한 여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남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막 전주에 부임한 하위렴 역시 진료소를 열기 위한 준비로 바빴던 터라,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자신 말고는 딱히 내려갈 사람이 없었다.
전킨의 다급한 요청으로 군산에 내려온 하위렴은 자연스럽게 데이비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남장로교 서소문 선교부에서 이미 만난 일이 있었지만, 서로 간에 동료 선교사로만 여겼지,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려 수덕산에 있던 선교부에서 시내까지 내려갈 수도 없을 만치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러나 두 사람은 눈으로 갇힌 선교부에서의 생활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주일에는 수세자를 포함해 몇몇 교인들이 교회를 찾았으나 하위렴이 예배를 인도했고 주중에 있는 여성 성경공부는 데이비스 양이 맡아 진행했다. 진료소마저 눈으로 갇힌 상태라 찾는 이도 드물어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좋았다.
두 사람이 군산에서 만나는 동안 싹을 틔웠던 연모의 감정을 하위렴은 일기에 남겨 놓았다.
1896년 12월 14일
내가 드루 박사와 전킨 목사가 서울에 가서 없는 동안에 데이비스 양에게 드루 부인과 함께 머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여 받아들여졌다
1897년 2월 18일
데이비스 양이 말수가 줄었는데 의심할 것 없이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다.
하위렴이 그해 겨울을 군산에서 보내고 다시 전주로 돌아간 것은 전킨과 드루가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 초봄이 다 되어서였다. 하위렴과 데이비스가 전주와 군산으로 서로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를 향한 연모의 감정은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전주-군산 간 신작로가 생기기 전이라 오가는 일이 쉽지 않았음에도 데이비스와 교제를 이어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1897년 8월 30일
데이비스 양의 구두를 돌려주려고 드루의 집에 들렀다. 내가 최후의 통첩을 하는데 좀 더 가까워진 셈이다.
1897년 10월 1일
데이비스 양의 집에 들렀는데 또다시 "남자답지 못했다."
1897년 늦가을, 하위렴은 전킨의 초대로 군산에 내려갔다. 그는 전주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데이비스를 만나 청혼을 할 거라고..."
그날 그곳에 모였던 선교사들이 강변으로 오리 사냥을 나갔을 때 하위렴과 데이비스는 일행과 떨어져 갈대가 우거진 개펄을 뒤로하고 포구를 바라보며 섰다. 간혹 새들이 날아오르고 희뿌연 해무(海霧)가 바다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호젓한 억새 숲 사잇길을 걷다가 하위렴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청혼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혹시 듣지 못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그녀가 들은 듯했다. 그녀가 발그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녀의 음성이 미풍에 밀리며 감미로운 화음처럼 들렸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들 앞에 펼쳐질 조선에서의 여정에 대해 밤이 늦도록 이야기했다. 토담 밖에서는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1897년 10월 29일
벨과 테이트와 내가 데이비스 양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녀의 요리 솜씨가 참 좋았다.
1897년 11월 1일
다른 사람들이 언덕으로 오리 사냥을 나가는 동안, 나는 더 아름다운 사냥을 계획했다. 이번만은 남자답게 굴어야지 다짐하면서 나는 내 생애에 처음으로 가장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둔 말을 했다. 내가 했던 그 말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 같았으나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내가 급하게 돌아서서 나오려는 순간 데이비스가 다가와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급히 언덕으로 올라갔다. (중략) 그날 나는 오리를 세 마리나 사냥했는데 한 마리를 그녀에게 보냈다.
어쩌면 데이비스는 내한할 때까지만 해도 독신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머나먼 은둔의 나라 조선 땅에서 목표와 비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데이비스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라면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4살 연하의 남자라는 조건은 하등의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느껴졌다. 하위렴과 데이비스의 결혼 소식은 선교부를 비롯해 내한 선교사들 사이에도 큰 화제를 몰고 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898년 6월 9일 서울에 북장로교 독신 선교사 숙소에서 열렸다. 데이비스가 처음 내한해 수잔 도티(Susan A. Doty)와 함께 3년 동안 거주한 곳이었다. 지루한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 오는 하객들의 참석을 막지 못했다. 아름다운 꽃들로 식장이 꾸며졌고, 주한 미국 공사 알렌 부부와 그 두 아들, 한성판윤 이채연 부부, 북장로교 무어 부부와 레이놀즈 부인 그리고 정신 여학교 학생들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주례는 레이놀즈 목사였다.
참석한 모든 이의 축복 속에 조촐한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은 함께 군산에 내려왔다. 데이비스의 살림을 마차에 싣고 전주 은송리 선교사 숙소로 이사하는 그 날, 참으로 황홀한 시간이었다. 흙먼지가 나는 40Km의 황톳길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그해 8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백종근 목사는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와 프린스턴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선교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하고,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교회 역사를 찾고 있다.
#백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