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있는 달이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40위)과 장군 제1묘역(288위)에서는 광복에 이어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초석이 된 분들을 만날 수 있다.
장군묘역(1, 2, 3)에는 총 355위가 안장되어 있다. 대부분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여했고 두 전쟁 모두 참전한 분들도 있다. 사실 광복군에서 활동한 분들의 대한민국 건국군 참여가 결코 많지 않았다. 이는 당시에 군정 당국이 임시정부 자격으로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고 사설 군사단체 해산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군정 당국이 자신들의 존재와 헌신을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으로 경비대 창설에 소극적이었다. 군정은 통위부장(국방장관)과 국방경비대 사령관에 임시정부 인사를 영입했지만, 광복군들의 인사가 국군의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이범석 장군이 국방장관에 임명된 후에 군 요직에 광복군 출신이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2년까지는 광복군 출신 4명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군 간부들을 양성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미 전략정보국 책임자 윌리엄 도너반과 협의하여 국내 정진을 위한 독수리 계획을 수립하였다. 국내 정진대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노능서, 장준하, 김준엽과 OSS 측 윌리스 버드 대령, 클라이프 서전트 대위, 통역관 정운수 대위 등 18명으로 편성되었다.
1945년 8월 18일 아침 중국 서안을 이륙한 미 육군 수송기(C-47)는 그날 오후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광복군들이 활주로에 내려서자 탱크, 박격포, 기관총을 배치한 일본군들이 수송기를 둘러싸고 회항을 요구했다.
충돌을 우려하여 다음날 부득이 회항하게 된다. 임시정부는 10만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국군의 이름으로 귀국할 계획을 세우고 오광선을 국내 지대장으로 파견했다. 서울 동대문 근처에 광복군 지구사령부를, 대전에 경비훈련소를 각각 설치하여 광복군의 귀국에 대비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광복군에 편입된 일본군 출신 한인 장병 35,000명이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국군을 창군하도록 군정에 건의하였고 일본군 출신 장교들도 광복군으로 창군계획서를 김구 주석에게 제출하였다. 하지만 군정 당국이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광복군은 개별적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군정 당국은 1945년 11월 국방사령부와 1946년 1월 조선경비대를 창설하고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하여 군 간부 요원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 각각 20명씩 총 60명을 선발할 계획이었지만, 총 200명이 입교하여 110명이 임관하였다. 일본군 출신 87명, 만주군 출신 21명, 광복군, 중국군은 2명이었다. 광복군 출신은 군정 당국에 대한 불만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과 함께 교육받는데 대한 거부감으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가 폐지되고 조선경비사관학교가(육사 전신) 창설되었다. 군정 당국은 광복군의 집단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창군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닐 버나드 대령이 상해로 가서 지청천 장군을 초대 통위부장에 청빙했지만 거절당했다.
1946년 9월 군정은 미국인 통위부장을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으로 교체하고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광복군 송호성을 임명하였다.
유동열 장군은 1903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복무하다가 대한제국 군대에서 육군참령을 지켜내다가 군대 해산 후 신민회에 참여하여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와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 국무위원을 지내며 광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광복 후 군정청 통위부장으로 국군의 모태가 된 국방경비대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고 1948년 8월 31일 이범석 초대국방장관에게 이양함으로써 격동기의 임무를 완수하였다.
당시 30여 개 군사단체가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군정청이 군 최고 사령관에 광복군 출신을 초청한 것은 한국의 정통성을 중요시한 것이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자 광복군 출신의 입교가 늘어났다. 창군 요원을 출신별로 보면 광복군 중국군 28명, 일본군 244명, 만주군 44명 등이다.
군정청은 독립군, 광복군, 국군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통의 맥을 국군에 물려주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방경비대는 1946년 11월 5,500명에 이르렀고 해방병학교와 육군항공사관학교의 개설로 해군, 공군 간부가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정통성을 위하여 국방부 장관에 이범석 장군을 임명했다. 이에 광복군 출신이 국군에 더 많이 참여하였다.
1948년 9월 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에 편입되었다. 또한 육군에 포함되어 있던 공군이 1949년 10월 1일 자로 독립함으로써 국군은 육, 해, 공군의 3군 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광복군, 중국군 출신의 독립유공자 50여 명이 국군의 간성이 되어 6.25전쟁에 참전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였다. 독립과 창군과 호국의 아버지들을 현충원에서 만나보자.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