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소원을 갖고 희망을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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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박사(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사회나 이웃의 도움 없이 홀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렵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처로 혼란했던 그 때, 농촌에서 아무것도 없이 여성 홀로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어렵던 시절에 경남 김해로부터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부산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소명을 받고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703M)기도원 (일제강점기에 고신측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성도, 애국지사들이 구국기도회를 하였던 장소) 아랫동네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둘째 부인으로 땅 한 평 없이 4명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가정의 경제적 빈곤은 해결되지 못했고 중학교 때에는 몇 백 명의 전교생들 중에 자신만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을 정도였다. 새 학년이 되면 선생님에게 짝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가난의 열등감 속에 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으며 끈기를 가지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없는 그가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돈은 다 어디 갔나? 그 돈 먹어 보고 죽고 싶네”라는 어머니의 한탄이 날마다 이어졌다. 예수 믿기를 권고 받았지만 거부하였던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마음 따뜻한 친구의 전도로 20여 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참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습니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생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

중학교를 졸업한 손현보는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였고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진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새벽과 방과 후 시간을 내어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력하였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고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힘든 생활을 견디었다. 산 중턱에 있는 무척산기도원까지 기도원에 올라가는 사람들의 짐(반가마니의 쌀과 생활용품 등)을 지개로 옮겨 주며 모은 품을 용돈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대학을 가기위해 원서를 낸 고신대학교에 합격은 하였는데, 워낙 가난한 집안에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고 외삼촌은 “논 30마지기가 있어야 그 수익으로 공부를 하는데 논도 없는 네가 어떻게 대학교를 다니느냐?”며 핀잔하셨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분명히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학 입학금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중이었다. 부산 주례 삼거리 철길 위에 올라가면 불현사가 있는데 놀러오라고 했던 기억이나 절에 가서 승려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승려가 “어 자네 웬일인가?” 놀러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 예 합격했습니다. “등록금은 준비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요즘 등록금은 얼마나 하나?” 입학금까지 60만원 가까이 합니다. “그래… 놀다가라” 네, 하고 그는 산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찬송하며 뜨겁게 기도하고 내려오다 절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승려를 만나고 가라 하였다.

인사하는 현보에게 승려는 돈 봉투를 주시며 등록하라고 하셨다. 자신은 그 돈을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하였으나 “열심히 예수 믿어서 부처가 되면 되지”라고 하였다. 막상 고신대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숙식할 곳을 찾지 못해 다시 절로 갔다. 승려의 도움으로 1년 동안 불현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통학을 했다는 손현보는 그 당시 도움을 주었던 승려를 참으로 고마워했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은 군대가 잃어버린 시간, 없어져야 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라며 기도했다. 손현보 신학생은 신학대학교 12월 3일 전 날까지 학기말 고사를 치루고 군 입대를 하였다.

논산육군훈련소에서 차출되어 701 특공대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회에 간다고 하면 선임들이 구타하고 기압을 주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 갔다. 후에는 입술과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절뚝거리는 상황에서도 교회에 갔다. 나중에는 하나 둘 전도하여 소대 전체가 복음화 되었고 부대장까지 예수 믿고 집사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

그가 특공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태권도, 특공무술은 자신이 없었다. 하루는 장군, 중령 등의 지휘관이 입회하는 특공대 공수교육 행군이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자신을 이곳에 부르신 뜻을 발견하였다. 쓰러진 동료의 군장 25kg을 앞으로 메고 자신의 것은 뒤로 무장 한 채 최악의 상황에서도 완주하여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최종지점까지 달려 1등을 하였다.

손현보 목사는 특공부대 대장으로부터 특공모범상을 받았고 군부대에 도서관을 만들며 장병들의 정서와 교양을 위해 노력하였고 군 생활에서 소대 전체를 복음화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는 매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로 작정하였다.

시골마을에서 다섯 번의 교회 건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영혼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사역 그리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우남학교를 준비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둥 같은 인물을 양성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사회 곳곳에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능력 있고 자유통일, 복음통일의 시대에 지도자들로 쓰임 받게 될 인물을 키우는 교육에도 비중 있게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멋진 역사를 목격하였다. 개개인의 삶의 여정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손현보 목사의 삶에서 보았듯이 예수 안에서 희망을 품자. 현재와 미래에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현실은 매우 힘들고 어렵더라도 당당히 극복하며 살아가자.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