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마치 최고의 인기 스타 같으셨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내신 분! 사람들은 옛날의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셨다고,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이 오셨다고 좋아하고 흥분하고 난리다. 벳새다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저 분만 따라다니면 절대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까지 했다(6:15).
그런데 최근 소식은 그 인기에 기름을 부은 것, 인기 절정이다. 예루살렘 입성 전, 2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소문 때문이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 그야말로 어메이징이다. 불과 얼마 전 일이라 아직도 눈에 선하다. 순식간에 퍼진 소문, 그 소문은 예루살렘을 강타하기에 충분했다.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직접 본 게 있었을까? 몇 명의 헬라 사람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한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이방인 헬라인들이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하신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얼핏 생각하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는 말씀과 상충되는 것 같은 말씀, 마치 섬기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 같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주님이 계신 그 곳’에 함께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고난도 함께 겪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섬기다가 목숨을 잃는다는 의미’라는 것인데 그렇게 말씀하면서 결론은 확 달라진다.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가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베다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나사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전무하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주인공 나사로, 사람들이 도대체 이 역사적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어서 찾아올 정도로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이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면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얼마나 더 유명인사가 되셨겠나? 말할 나위 없다. 스타에도 급이 있는 것, 예수님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슈퍼스타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연호하며 대 환영한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 그토록 고대하던 왕, 굶주림과 병중에서 해방시키고 식민 상태에서 해방시킬 왕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사람들은 제각기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다.
본문에 나오는 헬라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들 역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부류였다(20절). 성경은 그들을 예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 했지만 이런 전설도 있다. 이 헬라 사람들은 에데스다 왕국의 사신들이었고, 그들은 에데스다 왕의 아들이 한센병에 걸려 죽어가나 백방으로 애를 써도 고칠 수가 없었는데 소문에 유대 땅에 예수라는 분이 한센병도 고친다고 해서 찾아온 사신들이라는 거다. 문제는 예수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것, 이방인들이라 차례가 오기가 더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헬라 문화에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빌립이다. 빌립은 이름 자체가 헬라식이다. 헬라어도 능통해서 이미 헬라 사람들과 어떤 인간관계를 형성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빌립을 통해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21절). 빌립은 헬라 사람들의 요청을 받고 고향 친구 안드레에게 갔다. 면담을 주선해 주자는 의논 후 빌립과 안드레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께 가서 면담을 요청한다(22절). 전설로 추정해 보면 그들은 “여기 계시지 말고 에데스다로 가십시다. 왕의 아들의 한센병만 고쳐주시면 평생토록 왕의 고문으로 추대되실 수도 있고 편안하게 모실 것입니다” 그랬든지 아니면 “이 위험한데 계시지 말고 에데스다로 가십시다. 절대 안전할 겁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럴 듯하지 않나? 우리도 잘 쓰는 방법 같지 않나?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절), 이 말은 이쪽은 에데스다 나라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세속적인 영광의 길이고, 저쪽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패배와 굴욕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와 영광이라는 말씀, 요한복음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가상 7언도 공관복음서와 달리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이다. 결국 세속적인 영광과 영원한 영광 사이에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다.
이게 바로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예수님이 단지 이스라엘의 구속자만이 아니라 인류의 구세주시라는 것, 계속 “때가 아니다”라고 하셨지만 이방인의 대표이자 이방인의 대명사로 사용되기도 했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던 바로 그때,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온 세상이, 이방인들까지 예수님께로 몰려올 때, 그때를 하나님의 신호로 여기신 것이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 그때가 되었으니 “나를 따르라”, 함께 승리의 길, 영광의 길을 가자는 말씀이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중요한 말씀이 뒤따라 나올 때 나오는 길잡이 같은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으로 시작된 24절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후 자기를 비어 십자가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수 있으시다. 그러니 십자가는 예수님의 라이프 스타일, 이는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 순간의 죽음이 아니다. 계속 자기를 부인하셨고, 날마다 죽으셨다. 그 결과가 많은 열매였다.
그렇다고 죽는 것만 생각하신 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의 하나님이셨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게 생명, 씨앗은 생명만 있으면 위대하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구하던 중 한 미이라를 발견했는데, 미이라의 손에 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고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 그 꽃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그 꽃을 다시는 볼 수 없었으나, 떨어진 몇 알의 꽃씨를 발견해 영국으로 가지고 와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었다. 그런데 당시의 꽃들 중에는 없는 수종이었기에 이 꽃 재배에 관여했던 스웨덴의 식물학자 '다알'의 이름을 따서 "다알리아"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알리아의 전설이다.
모든 씨가 다 꽃이 되는 건 아니다. 또 모든 씨가 다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다. 살아있어야 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한다. 생명은 3천 년의 시간도 어젯밤의 경점 같게 만들었다. 생명은 죽은 것 같이 보여도 시간이 되면 다시 살아난다. 마치 부활 생명이신 예수님이 부르시니 나사로가 살아난 것과 같다.
그런데 말씀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철저한 자기 부인, 죽어야 열매 맺는 원리, 이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본래 그 인생이 두꺼운 껍질로 덮여 있던 사람이다. 그것도 껍질이 여러 겹이었는데 먼저 ‘혈통의 껍질’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정통 유대인이라는 혈통, 그 껍질에 ‘가문의 껍질’이 더해졌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 그 밖으로는 ‘종교의 껍질’이 둘러싸 있었다.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열정이 그 어떤 바리새인보다 뛰어난 사람 아닌가? 그리고 그 종교의 껍질 밖을 ‘학문의 껍질’이 덮고 있었다. 당대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다. 껍질이 두꺼워도 너무 두꺼운 사람, 그 어떤 것도 그의 인생 속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 그 껍질들이 그의 자부심이었고, 교만의 원인이었다. 그 껍질들 때문에 복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 껍질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인생 사이에 벽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만 옳다고 여기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
결국 하나님은 비상 수단을 동원해 그 껍질들을 깨뜨리셨다. 안 그러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인생이 성장할 수도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 비상 수단이 바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난 사건, 주님은 그를 쓰러뜨리셨다. 그 순간 그의 모든 껍질들이 산산조각났다. 완전 딴사람이 됐다. 껍질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후 그의 사역은 먼저 ‘철저한 껍질 깨기’였다. 달리 표현하면 ‘자기 죽이기’, 그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9:27), 자신의 두꺼운 껍질들, 즉 교만과 욕망을 스스로 쳐부셨다는 거다. 자기가 죽어야, 자기 속에서 생명이 싹트게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껍질 깨기’를 해야 한다. 교만도, 욕망도, 지식도, 아집도 다 죽여야 한다. 그 껍질들이 깨지지 않는 한 우리 안에 생명이 싹틀 수 없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기도가 아니라 ‘껍질 깨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깨지게 하소서. 교만도, 아집도, 욕망도 다 깨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심어 주신 생명의 씨앗이 자라게 하소서”
24절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땅속에 심겨지는 것’인데 축축하고, 세균이 득실거리고, 냄새 나도, 갑갑해도, 견디기 힘들어도 땅속에 심겨져야 한다는 것, 씨에게는 흙 속이 자기 죽음의 자리다. 하지만 죽음의 자리이기만 한 건 아니다. 위대한 새싹을 틔우게 하는 은총의 자리이기도 하다. 거기서 씨앗의 껍질이 다 깨진다. 이게 보편적 진리다. 그런데 이 일반적 진리, 보편적 진리가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얻으신 우리 주님께 적중하는 진리였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껍질이 썩고 깨지려면 흙 속에 묻혀야 한다. 그 흙은 시련이란 이름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회를 통해 우리가 더 강해지기를 원하시는 것, 힘들어도 흙 속에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귀히 여기신다
바클레이(William Barclay)에 의하면 23절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드디어 나팔이 울려퍼지고 하늘의 군대가 진군을 개시하며 막바지 싸움을 펼치고 승리할 것으로 믿었겠지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다”고 했다. 유대인들에게 영광의 때는 하늘 군대의 말굽 아래 적대적인 지상의 왕국들이 붕괴되는 것을 뜻하지만 예수님은 영광이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인 동시에 죽음의 자리라는 말씀이다. 물론 순서는 죽음의 자리, 그러나 결국 영광의 자리가 될 것이다.
묻는다. 어떤 영광을 생각하며 그 영광은 어떻게 얻는다고 생각하나?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인기가 오르며 얻는 영광인가? 아니다. 다르다. 얻는 방법도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신 후 바로 다음 절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얻는다’고 하셨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죽음으로써 얻는 영광’이다. 25절도 보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헬라 사람들을 따로 만나 이야기하며 인기 얻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얻는 영광은 진정한 영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다. 그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진정한 구세주가 되시는 것, 돌이켜 보라. 결국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구원받을 길이 열린 것,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가 맺히지 않았나? 만약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인기나 얻고,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구원의 자리’이자 ‘영광의 자리’가 된 것, 예수님은 나를 섬기는 자가 되면 아버지가 그를 존귀하게 하신다고 선언하신다.
혹시 아직도 은 쟁반 위에 놓인 씨가 좋아 보이나? 영광과 인기는 한순간, 자랑거리를 끌어안고 사는 것도 한순간이다. 왜 그토록 똑똑하던 바울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뒤따랐을까? 패가망신하고 끝난 사람, 변방으로 완전히 밀려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바울은 민족은 물론 전 세계 위에 그늘을 드리우는 거목이 되었다. 우리도 주님이 계신 곳에 있어야 한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그 자리가 십자가, 죽음의 자리, 견디기 힘든 끔찍한 자리처럼 보여도 결국은 영광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자리임을 믿고 깨지더라도, 썩더라도, 죽더라도 기꺼이 깨지고, 기꺼이 썩고 기꺼이 죽어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존귀히 여기시는 복된 자리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