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지속된 집중 호우와 장마로 압록강 유역이 범람하는 등 북한 지역에 최악의 수해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인도적 물자 지원’ 의사를 밝히자 이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북한 김정은이 우리 언론의 북한 피해 보도에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며 과민 반응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북한은 최근 내린 집중 호우로 압록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 북한 노동신문은 “신의주시와 의주군의 여러 섬 지역”에서 “5000여명의 주민이 침수 위험구역에 고립됐다”며 물적 피해와 관련해 “살림집 4100여 세대와 농경지 3000정보(900만평), 수많은 공공건물과 시설물, 도로, 철길이 침수됐다”고 전했다.
북한 김정은은 고무보트를 타고 홍수 현장을 돌아보는 도중에 인명 피해의 책임을 물어 사회안전상과 자강도당 책임비서를 경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해 복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책임자를 해임한 것으로 볼 때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한 걸 직감할 수 있다.
통일부는 북한의 홍수 피해를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보고 있다. 위성사진을 보면 압록강 하구 위화도 전체와 의주는 물론 자강도 만포시까지 침수가 식별된다. 정부가 즉각 북한에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부는 지난 1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며 “동포애의 견지에서 북한 이재민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들을 신속히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은 우리 정부 제의엔 가타부타 언급 없이 북한 지역의 홍수 피해 상황을 보도한 언론을 향해 “적들의 쓰레기 언론”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과민하게 반응했다. 구조 임무 중 여러 대의 헬기가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는 언론 보도에 “날조된 여론을 전파시키고 있다”면서 “이런 모략 선전에 집착하는 서울 것들의 음흉한 목적은 뻔하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국제적십자연맹(IFRC)은 지난 13일 이번 홍수로 지금까지 북한 주민 22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됐다고 밝혔다. 또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비정부기구, ACAPS는 이보다 6배가량 많은 135명이 숨졌다고 집계한 바 있다.
그런데도 북한은 압록강 유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침수 피해가 제일 컸던 신의주 지구에서 인명피해가 한 건도 없었다고 밝혔다. 구조 작업 중에 헬기 추락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임무 수행 중 1대의 직승기가 구조 지역에서 불시 착륙한 사실이 있으나 비행사들이 모두 무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북한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북한은 과거 이보다 더한 재난 사고가 일어나도 인명 피해에 대해선 상세히 밝히지 않고 인명 구조 등 업적만을 자화자찬하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바빴다.
북한이 인명 피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1차적으로 내부 동요를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임자를 즉각 경질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 그대로 노출될 경우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민심이 김정은 정권에 대한 반발 심리로 작용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북한에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고 외부의 도움을 받는 모습은 무소불위의 절대자로 군림한 김정의 이미지와 리더십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 대신 자신이 직접 수해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문제를 해결했다는 과시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건 신속한 구호와 지원이지 한가한 ‘영웅놀이’가 아니다.
집중호우에 따른 북한의 수해는 매년 되풀이 되는 만성적 자연재해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유독 북한 지역에만 호우가 집중돼서 발생하는 국지적 기상 문제가 아니라 재해 예방을 위한 기반이 제대로 정비돼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그런 이유로 일시적인 가뭄과 홍수에도 주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식량 생산 차질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최근 유엔 세계기상기구(WMO)가 1995년 북한의 대홍수를 지난 반세기 사이 전 세계에서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1970년에서 2019년 사이 발생한 모든 자연재해 피해 현황을 토대로 발표한 건데 그 피해가 ‘인류 재앙’ 수준이었다는 평가다.
북한은 당시 입은 홍수 피해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지역의 최악의 대기근으로 약 10만~40만 명의 북한 주민이 굶어죽은 대참사를 말한다. 아무리 홍수와 가뭄 등의 기근이 겹쳤더라도 수십 만 명이 굶어죽는 현실은 상상 불가다.
이번 홍수 피해 또한 김정은 집권 이후 최악의 재해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선대 김일성 김정일 당시 벌어졌던 재난 상황의 반복이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당장 홍수방지 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주민들을 희생제물 삼아 핵무기 개발에 모든 재원을 쏟아 붓고 있는 게 김정은 정권의 실상이다.
이러한 때에 정부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힌 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강대 강 대결로 치닫고 있는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북한의 자세다. 우리 정부가 내민 손을 북한이 당장 덥썩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성의 있는 자세로 대화에 응해야 할 것이다. 지금 북한의 상황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다. 지도자라면 자존심과 체면을 내세울 게 아니라 고통 속에 있는 북한 주민을 위해 용단을 내리는 게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