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 운동에 신학적 문제 없다”

오피니언·칼럼
오피니언
  •   
로잔 대회에 관한 고신 총회 보고서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미국 변호사) ©이태희 목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 중의 하나인 고신 교단의 경기북부노회장 송성규 목사는 2024년 9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4차 로잔대회에 고신총회에 속한 대학이나 교수, 선교 기관이 참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총회의 참석금지결정을 요청한 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1. 송성규 목사의 청원 이유와 근거

송성규 목사가 제출한 청원서에 따르면, 로잔운동은 “자유주의자들과 로마카톨릭, 안식교, 애큐메니컬 운동과 같은 이단들에 대하여 포용적인 신복음주의” 선교 운동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와 같은 판단을 한 근거를 다음의 4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 1차 로잔대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빌리 그래함과 칼 헨리는 로마 카톨릭에 우호적이었던 “신복음주의자들”이었다.

2)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던 제2차 로잔대회에 신사도 운동가인 피터 와그너, 제이 콥스, 조지 오스티, 루이스 부쉬, 조지 도우슨이 강사로 참여하며 지역 귀신론을 가르침으로 신사도 운동이 시작되었다.

3) 2010년 남아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제3차 로잔대회에는 로마카톨릭, 정교회, WCC에서 1천 명이 초청되어 다원주의와 혼합되는 양상을 보였고, 따라서 로잔 운동은 종교다원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4) 인터콥의 홈페이지에 로잔 언약에 기초한 신앙 고백을 표방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인터콥이 신사도 운동을 수용한 것은 로잔 운동에서 이단 사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송성규 목사의 청원에 대하여 고신총회는 청원서가 제시하고 있는 4가지 이유의 객관적인 근거와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였다. 고신총회가 검토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 청원서가 제시하고 있는 이유의 객관적인 근거와 타당성 여부 검토

1) 빌리 그래함과 칼 헨리가 로마 카톨릭에 우호적이었던 “신복음주의자들”이었다는 주장은 총신대 문병호 교수가 2021년 6월 8일 발표한 논문 “WEA 신복음주의 신학과 에큐메니칼 활동 비판”과 이언 머레이 (Iain Murray)가 쓴 두 권의 책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논문과 책은 WEA(세계복음주의연맹)에 의해 제1차 로잔대회(1974)가 열렸고, WEA는 신복음주의로서 WCC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타협하여 복음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로잔 언약 자체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개인들의 행보에 근거하고 있으며, ICCC의 설립자인 칼 매킨타이어와 같은 신근본주의자들의 분리주의 주장과 그 내용이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총신대 교수인 김성태, 이한수, 박용규 교수는 “WEA와 교류 단절은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서울: 가리온, 2021)에서 문병호 교수의 주장을 또 다른 분리주의 길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다.

2) 송성규 목사가 제시한 2번째 주장은 안희열 교수의 논문 “로잔 운동이 세계선교에 끼친 영향과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선교와 신학 27집, 2011, p117)을 출처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희열 교수의 논문 117페이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또한 1989년 제2차 마닐라 로잔대회에 피터 와그너는 주 강사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 당시 피터 와그너는 “신사도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2001년에 이르러서야 “신사도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비성경적인 내용을 담은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신사도 운동이 시작된 이후 로잔 운동은 로잔의 공식 대회 문서인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케이프 타운 서약”뿐 아니라 로잔 주제 보고서들과 다른 문서들에서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을 전혀 옹호하지 않았고, 로잔 운동이 주최한 대회들에서 그를 강연자로 세운 바 없다. 따라서 제2차 마닐라 로잔대회(1989)는 신사도 운동과 연관성이 없다.

3) 송성규 목사가 제시한 3번째 주장은 교회연합신문 2009년 6월 12일자 글과 김 브라이언 목사가 2010년 11월 11일 기독일보에 쓴 글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김 브라이언 목사의 글에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출처가 제시되지 않았다. 제3차 로잔대회에 소수의 WCC와 정교회 대표들이 참관인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로잔 운동은 WCC가 주창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응하여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으로 WCC의 신학적, 선교적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의 신학과 선교에 관한 입장과도 현저하게 다르다. 로잔 운동의 공식 문서인 “로잔 언약”(1974), “마닐라 선언문”(1989),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2010)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적인 견해를 표방하고 있다. (https://lausanne.org/ko 참조)

4) 송성규 목사가 제시한 4번째 주장은 인터콥이 홈페이지에 인터콥의 신앙 고백으로 표방하고 있는 로잔 언약을 제시한다. 청원서에서 로잔 운동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는 10/40 창 운동은 로잔과 연관없는 AD2000 운동이며, 인터콥 홈페이지는 로잔 언약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른다”라고도 명시하고 있다. 인터콥이 홈페이지에서 로잔 언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른다고 명시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자신들과 관련된 이단 시비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주의적이며 정통적인 신학을 따른다는 것을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터콥이 로잔 언약을 홈페이지에 게시한 것을 근거로 로잔 운동이 신사도 운동을 추구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며 타당성이 없다. 로잔 운동의 문서들은 인터콥에 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으며, 인터콥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로잔 운동은 전 세계적인 교회, 교파 연합체 조직인 WCC와 달리 “선교 운동”이다. 따라서 인터콥이나 다른 어떤 이단들이 로잔 언약을 받아들인다고 표방하는 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

고신 총회는 이와 같은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3. 결론

앞에서 제시한 내용과 로잔 공식 문서들을 살펴본 결과 아래와 같은 이유로 고신총회가 총회에 속한 개인과 교회에 로잔대회에 참석을 금지할 만한 신학적 문제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1) 로잔 운동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이 운동의 공식 문서인 ‘로잔 언약’,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에 근거해야 한다. 하지만 청원서에서 주장하는 주요 내용은 로잔 운동의 공식 문서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로잔 운동을 주관적인 판단으로 기술한 2차 자료들의 인용에 근거하고 있다.

2) 로잔 운동은 WCC에 대응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표방하며 출발했다. 로잔 운동의 이러한 성격은 어느 대회에서나 “복음-교회-세상”이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로잔 운동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로잔 언약과 로잔대회 문서들에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표명된다. 이 문서들은 복음 전도의 우선성과 긴급성을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복음의 총체성을 견지한다.

3) 로잔 운동은 전 세계적인 교파 연합체 조직인 WCC와는 달리 조직이 없는 “선교 운동”이며, 지역 교회들이 협력하여 선교를 논의하는 플랫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이 대회에는 로잔 운동과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교회나 교파들에 속한 사람들이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로잔 운동이 로마카톨릭, 안식교, WCC 등과 같은 자유주의와 이단,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포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한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4) 최근 로잔 운동의 흐름을 보면, 복음의 총체성을 내세우면서 복음 전도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가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고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세계로잔대회에 참여하여 개혁주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면, 로잔 운동이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회복하여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전도와 선교의 활력을 되찾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사단법인 복음과 도시 이사, 미국 변호사)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