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십자가의 역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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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8~20)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1. 반전의 인생

인류 역사상 가장 반전의 삶을 산 두 사람을 꼽으라면 한 사람은 성경에 소개된 사도 바울이요, 다른 한 사람은 교회사를 찬란하게 빛낸 어거스틴 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핍박하던 사람으로 지내다 갑자기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오직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일로 인생을 불태웠습니다. 그가 두 발로 걸었던 거리만 해도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 정도였다 합니다. 궁금한 것은 도대체 이 정도 걸었으면 소요된 신발이 몇 켤레일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 발이 퉁퉁 부었을까 상상하니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어거스틴은 청년의 몸에 지닌 육체의 정욕을 할 수 있는 한 다 쏟아부은 대표적인 탕아였습니다. 일찍이 뜻이 있어(?) 가출한 이래 19살의 나이에 사생아를 낳고 아이의 엄마를 냉정하게 내친 비륜의 남자였습니다.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에 취하고 여자에 미쳐 노는 일이 그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주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체험하고 이후 오직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매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선언했지만, 어거스틴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죽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제가 죽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거스틴은 생명이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죽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며, 그 죽음은 자아의 본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평생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자아의 본성을 죽이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길고 지루하고 힘든 기도를 통해 최우선으로 ‘자기애’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회심한 이후의 어거스틴의 어록이나 연구나 설교에는 자신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오직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는 진술만 가득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교회사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제거하기 위해 세상을 멀리하고 속세를 벗어나 멀리 산이나 사막이나 은둔처를 찾아 모든 자연적인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금식하고 금욕하고 고행하고 몸을 학대하는 기행을 벌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너무나 질기고 강하기 때문에 몸을 학대하거나 집착을 억제하는 방법으로는 죽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육신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 중심에는 십자가가 분명히 자리 잡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십자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불려도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 십자가에 자아가 못 박혀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꿈틀거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고 화를 참지 못하고 경건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모든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그가 십자가에 제대로 못 박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십자가를 지거나 자신을 자기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혼자 모든 죽음을 감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자위합니다. 자기변명이자 자기 합리화입니다. 우리는 로마 황제처럼 자신의 머리에 면류관이라는 왕관을 쓰고 다른 사람을 향해 호령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계속)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