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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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선교사가 되기까지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다

고향에서 초중고를 마친 하위렴은 1883년 레바논에서 동쪽으로 64Km 정도 떨어진 버지니아 리치먼드에 소재한 센트랄 대학(Central College) 화학과에 진학했다. 그 당시 루이빌에 주립대학이 있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좀 더 경건한 학풍의 기독교 사립대학을 선택했다. 1871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버지니아의 햄던-시드니 대학(Hamden-Sydney College),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슨 대학(Davidson College)과 함께 남장로교 교단 산하의 교육기관으로 한창 이름을 떨치던 대학이었다.

그가 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하려 했던 것은 아마도 의대를 진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위렴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체질적으로 섬약했던 탓에 아버지가 바라던 목사 대신 의사를 꿈꾸고, 센트랄 대학을 졸업하던 그 이듬해 1889년 루이빌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루이빌 의대는 훗날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사역했던 포사이드(Wylie H. Forsythe)와 오긍선이 공부한 학교이기도 했다.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생자원운동(SVM)

하위렴이 대학을 입학하던 당시만 해도 대각성운동의 여파가 아직 가시기 전이어서 미국 사회가 신앙적으로는 여전히 고무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886년 여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열린 대학생 여름 수양회에서 장로교 목사 피어선(Arthur T. Pierson)과 무디(Dwight L. Moody)가 제시한 '세계선교에 대한 방향과 비전'은 참석한 대학생들을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세계선교학생자원운동(SVM)

무엇보다도 이 여름 수양회에 참석한 100여 명의 학생이 세계선교에 헌신하기로 자원하는 '프린스턴 서약에 서명하면서 '세계선교학생자원운동‘(SVM)을 단체로서 출범시켰다. 2년 뒤인 1888년 코넬대 출신 존 모트(John R. Mott)가 의장 겸 실행위원장에 선출되면서 실질적으로 '세계선교학생자원운동‘(SVM)은 근대 복음주의 선교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학생자원 운동의 열기가 전 미국의 대학가를 휩쓸면서 학교마다 세계선교의 비전을 제시하는 크고 작은 각종 활동을 펼쳤는데 당시 졸업을 앞두고 있던 하위렴의 관심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했다.

존 모트(맨 오른 쪽)

의과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로

하위렴은 이미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진로를 결정하고 나서부터 자신의 장래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이권 다툼에서 비롯된 남북 상잔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남북전쟁 후 대부분의 남부의 젊은이들이 가졌던 갈등과 고뇌, 그것이 꼭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 말고도 노예제 속에서 살았던 남부인의 가치관과 신앙의 괴리 사이에서 그는 학창 시절 내내 혼란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위렴은 때마침 대학가에 불어닥친 학생자원운동(SVM)을 만났다. 헤매던 방황의 터널 끝에서 만난 한 줄기 빛이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바람을 뒤늦게 기억해내고, 이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임을 깨달았다. 그는 거의 과정을 마쳐 가던 의과대학을 아무런 미련이 없이 자퇴하고, 이듬해인 1892년 다시 신학교로 그의 진로를 바꾸게 된다.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

버지니아 리치몬드(Richmond, VA)에 소재한 유니언 신학교는 당시 콜롬비아 신학교와 더불어 남장로교를 대표하는 신학교로 원래는 햄던-시드니 대학의 신학부가 떨어져 나온 유서가 깊은 학교였다.

하위렴이 유니언 신학교에 입학하던 그해(1892), 이미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는 전킨(William M. Junkin)과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1891년 테네시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신학생연합선교대회'에 강사로 왔던 북장로교 조선 선교사 언더우드와 조선인 윤치호가 조선 선교의 시급함을 호소할 때 큰 감동을 받고, 그길로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 선교를 지원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조선 선교사로 선발이 되어 파송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너무도 생소했던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된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후배 재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커다란 동기부여를 했을뿐더러 남북전쟁으로 분열된 채 침체를 맞은 교단에도 새로운 출구를 제시함으로써 큰 도전을 주고 있었다.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던 1894년 가을, 하위렴은 트랜실바니아(Transylvania) 노회에서 안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그는 켄터키주 메이슨 카운티에 소재한 메이스 릭(Mays lick) 교회의 설교 목사로 사역을 시작했지만, 그는 학창 시절 불태웠던 해외 선교사의 꿈을 버리지 않고 기도로 준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96년 마침내 하위렴은 켄터키에서의 짧은 목회를 접고, 은둔의 나라 조선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리고 앞서 떠났던 7인의 개척자의 뒤를 따라 단신으로 조선을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개척선교사들의 내한 여정

하위렴이 조선에 파송되기 이전에 먼저 내한했던 개척선교사들의 초기 정착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하위렴의 파송 행보와 연결된 초기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아 소개하기로 한다.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 조선 선교를 결정하고 7명의 개척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하위렴이 내한하기 4년 전 1892년 2월이었다. 그들은 전킨 내외, 레이놀즈 내외, 그리고 테이트 선교사 남매와 데이비스 양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7명의 선교사는 최종적으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함께 만났다.

세인트루이스는 그 당시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마더 로드(Mother Road)로 불리던 총연장 2,500마일의 국도 66번이 지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켄터키에서도 서부로 나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행은 테이트 남매의 모 교회인 센트럴 장로교회(Central Presbyterian Church)와 에비뉴 장로교회(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파송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의 축복을 받으며 장도壯途에 올랐다.

선교사 일행은 조선으로 귀국하는 주미공사 통역관이었던 이채연의 부인을 우연히 만나 합류하게 되었는데 마침 미혼이던 데이비스 양이 이채연의 부인과 룸메이트가 되면서 두 사람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요코하마에 이르는 태평양의 뱃길을 항해하는 내내, 일행은 그녀로부터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공부하며 보냈기 때문에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가는 멀고 먼 뱃길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와는 달리 전킨 부인과 레이놀즈 부인은 임신한 상태여서 2주간의 항해 내내 파도에 시달리느라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정도로 심한 뱃멀미로 시달렸다. 요코하마 항구에 당도할 즈음 이 두 사람은 거의 탈진상태였기 때문에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데이비스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요코하마에서 당분간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일단 데이비스만 이채연의 부인을 대동하고 먼저 조선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조선에 입국하려는 감리교 선교사 일행이 있어 그들과 함께 고베를 거쳐 제물포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892년 10월 17일 제물포에 감격의 첫발을 내디딘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최초의 내한 선교사가 된다.

스크랜튼(W. B. Scranton) 선교사 부부, 올링거(Rev. F. Ohlinger) 목사,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가 마중을 나와 환영해 주었다. 일행은 조계지 내에 이태(怡泰) 호텔이라 불리던 중국인이 경영하는 외국인 숙소에다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쉬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물때를 맞추어 다시 작은 범선을 타고 한강을 10시간 정도 거슬러 마포 나루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둘러 여자들은 가마를 타고 남자들은 도성까지 걸어서 올라갔다. 이미 성문이 굳게 잠겨 있었으나 가마꾼들이 아주 익숙하게 성을 타고 올라가 성 안쪽의 높은 둔대(屯垈) 위에 서서 마펫 선교사가 준비해 둔 밧줄을 성벽 아래로 늘어뜨리자, 성 밖의 일행들은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기어올라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성안에 들어온 일행은 이채연 부인의 친절한 도움과 마펫 선교사의 안내로 미 공사관의 부속 의사였던 알렌의 숙소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요코하마에 남아있던 나머지 일행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나서였다. 그들이 배에서 내릴 때는 데이비스와 달리 마펫을 비롯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조선 선교의 교두보 '딕시'(Dixie)

내한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곧바로 서소문 근처 전 독일 공사의 저택을 알렌으로부터 1,500불에 매입하고 전킨과 레이놀드 내외가 거주할 수 있도록 개조해 선교부 설치를 위한 교두보로 삼았는데 주변 선교사들은 이곳을 딕시(Dixie)라 불렀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매입했던 서소문의 독일 공사 저택

서소문 숙소에 7인 모두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는 테이트 남매가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거주하기로 했으며 데이비스 양 역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북장로교 독신 여선교사 숙소에서 도티(Susan A. Doty)양과 함께 머물렀다. 무엇보다 조선의 사정에 전혀 어두웠던 선교사들은 초기 3년여 동안은 의사소통을 위한 조선어 학습에만 매달려야 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내한하자 협력의 필요를 느낀 북장로교 선교부에서는 공의회 설치를 제안했다.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곧바로 그 제안에 합의하면서 이듬해인 1893년 1월 공의회를 설치했다. 공의회 첫날 회의에서 레이놀즈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노회가 조직될 때까지는 공의회가 개교회를 전권으로 치리할 수 있도록 결의하는 한편 잠정적으로 선교구역을 나누어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은 남장로교가 맡기로 했다.

남, 북장로교의 선교구역이 정해지고, 선교방침의 윤곽이 드러나자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전라감영이 있는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와, 전주를 서해로 이어주는 해상통로 군산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고 레이놀드와 드루를 군산으로,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탐사 임무를 주어 내려보냈다.

선교사들이 전주와 군산으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지역에서 동학농민항쟁(1894)이 발발했다. 급기야 농민군에 의해 전주성이 점령되자 미국공사관에서는 이 지역 선교사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서울에 머물도록 지시를 내렸다. 1894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도 긴급하게 선교사들의 철수를 결정했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곧바로 청일양국이 전쟁으로 치닫자, 남장로교 해외 선교부에서도 불안한 국제 정세를 우려해 조선보다는 오히려 중국 선교를 강화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었으나, 조선 선교사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보다 한해 전인 1893년 봄, 서울에서 태어난 전킨의 아들이 9개월 만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고, 그해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레이놀즈가 북한산으로 피서를 갔다가 절간에서 낳은 첫아들마저 10일 만에 죽는 일이 생긴 터에, 어수선한 정세까지 맞물려 조선 선교는 처음부터 시련이었다.

남장로교 7인의 개척선교사

비록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불안한 정세와 낯선 풍토에 적응하기조차 쉽지 않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전킨은 서소문에서 예배 공동체를 열고 있었고, 레이놀즈와 데이비스 양 역시 인성부재에서 채플 모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후에 남장로교의 선교구역이 호남으로 결정되면서 안타깝게도 이들의 예배 처소가 조직교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지만,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남긴 귀중한 선교의 흔적이라 할 만하다.

백종근 목사는

백종근 목사

한국에서 한양대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머물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하고, 지역 교회사 세미나를 인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해 집필 중에 있으며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교회 역사를 찾고 있다.

#백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