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주의 성경관과 생명윤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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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생명윤리(25)] 생명윤리를 무너뜨린 영국 신학사조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닌 영국

이명진(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상임운영위원장,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전 소장)

1866년 여름 대동강에 배 한 척이 화염에 싸여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다. 배를 벗어난 한 청년이 조선인들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네주고 죽음을 맞이한다. 영국 런던 선교회 소속 29세의 토마스 선교사다. 영국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머나먼 미지의 땅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존 낙스와 같은 신앙의 거장을 배출하였고, 찰스 스펄전과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설교자를 배출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나라다. 산업혁명을 통해 전 세계의 문명을 선도한 나라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진 핍박과 죽음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켜온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하지만 이제 영국을 더 이상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기 힘든 상황이다. 웅장하고 멋진 교회 건물이 술집과 카페, 무슬림 사원으로 팔려나가고, 낙태와 동성애가 만연하다. 기독교 문화에 앞장서던 영국이 생명윤리와 성윤리의 타락을 이끄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복음을 전해준 영국이 선교지로 입장이 바뀐 상태다. 비공식적인 통계로 약 300명의 한국 선교사가 영국에 파송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19세기 독일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적 영향은 영국 신학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신학이 계몽주의 철학 사조의 흐름을 타고 세속화되면서 제일 먼저 나타났던 현상이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유물론이 바탕이 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영국의 신학 사조는 급격하게 자유주의 신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헤겔의 철학적 사고나 이를 기반으로 한 신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 혼합된 신학 사조의 흐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 생명의 경시하는 법을 만들고,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문화를 강요하는 사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신학사조

19세기 영국의 신학 사조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복음주의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기독교에 정면 도전하는 유물론과 진화론이 나오면서 이들과 혼합된 신학 사조가 누룩처럼 일어난 시대이기도 하다. 과학적 발견과 이성적 사고가 종교적 믿음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조가 번져갔다. 전통적인 신앙과 교리의 권위를 의문시하며,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확산되어 갔다.

이런 복잡한 현상들은 19세기 영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였다. 산업혁명과 사회적 변화, 과학적 발견 등이 맞물려 새로운 자본가 탄생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물질주의의 팽배로 사회개혁 요구와 종교에 대한 실망과 회의가 일어났다.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은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경에 기반한 강력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을 촉구했다. 당시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성경 중심주의와 성경의 권위에 중점을 두고 영적 각성을 통한 개인의 구원과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노예제 폐지와 같은 사회개혁에도 적극 참여했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찰스 시메온(Charles Simeon) 주요 인물이다. 노예제 폐지 운동, 빈민 구제, 교육 개혁 등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며 그들의 신앙을 실천했다. 이러한 활동은 사람들에게 복음주의 운동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 한편, 복음주의 신학과 성경관을 달리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고등비평, 사회참여를 강조한 기독교 사회주의가 동시에 일어났다.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은 계몽주의와 과학적 발전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중반부터 대두되었다. 성경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며,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전통적인 교리와 신앙보다는 도덕적, 사회적 진보를 강조하며, 종교의 사회적 역할에 집중했다. 이러한 신학적 접근은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

① 성경의 권위 약화 문제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역사적, 문학적 문서로 보았다. 성경의 권위와 신빙성을 약화시키고,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들이 부정되거나 축소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약화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분을 도덕적 스승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약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③ 기적과 초자연적 사건 부정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초자연적 사건들을 의심하거나 부정했다.

④ 윤리적 상대주의
절대적 도덕적 기준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강조함으로 생명윤리와 성윤리의 타락을 초래했다.

⑤ 신학과 철학의 혼합
칸트, 헤겔 등에 영향을 받아 철학적 합리주의와 낭만주의가 신학적 사고에 침투하면서, 신학의 본질적 요소들이 철학적 개념에 의해 왜곡되었다.

⑥ 종교 다원주의 수용
모든 종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유일한 구원 진리를 부정했다.

⑦ 구원관의 문제
구원을 개인적인 도덕적 발전이나 사회적 진보로 보았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과 교회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같이 영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들을 재해석하거나 부정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사회 각 분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됐다.

고등 비평(Higher Criticism) 역시 독일의 성경 비평의 영향으로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발전했다. 성경을 역사적, 문학적 문서로 분석하며, 성경 저자들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을 연구했다. 성경에 대해 비판적 이해와 해석을 시도하며, 이는 자유주의 신학과 맞물려 기존의 보수적인 신학에 도전했다. 고등비평은 최근 퀴어신학이라는 성경 왜곡 신학의 뿌리가 되었다.

기독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의 열악한 조건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개인 구원을 넘어 사회 정의와 평등을 실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동체와 협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 해방신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우생학이 탄생한 배경

복음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혼재한 영국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점점 위축되어 갔다. 여기에는 무신론과 유물론을 바탕으로 한 진화론과 우생학이 큰 역할을 했다. 거짓 과학인 우생학이 탄생은 당시 신학 사조의 퇴조와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였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이 모이면서 자본가들과 귀족층이 증가하고 빈곤층이 급증한다. 한편 과잉생산으로 인한 대공황을 접하게 된다. 빈곤의 문제가 더한층 심각하게 대두된다. 사람들은 종교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교회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탈출구로 눈을 돌리게 된다.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통해 발표한 진화론은 사람들의 생각과 신앙을 뒤바꿔 놓기 시작했다. 다윈의 사촌인 골턴은 19세기 말 영국의 산업화의 위기에 처한 역사적 상황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우생학을 탄생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새로운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위치를 보존하려는 욕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생학을 택했다. 영국은 19세기 말 보어전쟁(Boer War)에서 패배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보어전쟁에 나갈 군인을 선발하면서 발생했다. 건강하고 체력이 좋은 귀족층과 상류층 젊은이는 입대 기준에 맞기에 전쟁에 나가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신체적으로 체력이 약하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지 못하고 영국에 남아 자녀를 낳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영국은 위기감을 갖게 되면서 국가적 효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우생학이 과학적 담론으로서 또 사회적 실천의 이념으로서 안착할 수 있도록 좋은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19세기 말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영국의 기득권층은 선택과 제거의 논리를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하는 사회 다윈주의를 받아들였다. 영국에서 시작된 우생학은 독일과 미국 등으로 급속하게 전해지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절대 교리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생명윤리와 성윤리의 타락

영국이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우학생이 등장하자 필연적으로 생명 경시 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68혁명과 페미니즘의 등장으로 성윤리의 타락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1967년 낙태법을 제정하여 1968년부터 임신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했다.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보다 5년이나 빠른 입법이다. 1978년 시험관 아이를 처음 탄생시켰다. 안타깝게도 의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이득만 주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하도록 부추키기도 한다. 시험관 아이를 낳게 한 보조생식술은 동성 커플의 대리모 출산, 비혼 출산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 2001년에는 공리주의에 빠져 배아 파괴 연구를 허용했다. 2010년에는 2006년 제정한 평등법을 4년 만에 전면 개정하여 성적지향과 성정체성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금지 시키는 개정 평등법을 통과시켰다. 2014년에는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학교에서는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성교육 커리큘럼을 도입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이 성정체성 혼란을 일으키고 청소년들이 성전환 약물치료와 수술을 받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영국 프로스펙트 매거진의 2020년 3월 3일자에 보도된 영국 국민건강기구(NHS) 산하 젠더 정체성 개발 지원소 발표에 따르면 성전환을 원하는 18세 이하 아동과 청소년이 2009년 77명에서 2019년 2,590명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한편 청소년들에게 성전환 치료를 하던 타비스톡(Tavistock) 클리닉은 청소년들에게 호르몬 억제제와 같은 치료를 너무 쉽게 처방한다는 의료윤리적 문제를 발생시켜 2024년 4월 폐쇄 결정되었다.

벧엘로 올라가자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바로 서 있으면, 세상 풍파가 엄습할 때 안전한 포구가 되어 주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 신앙의 지향점이 바뀌게 되면 성경관이 바뀌고 신앙도 변질되어 버린다. 모든 이방 신상과 소중히 여기던 소유를 과감히 버리고 벧엘로 올라간 야곱처럼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 회복 운동이 한국에서 일어나길 기도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1~5)

이명진(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운영위원장, 의사평론가, 의료윤리연구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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