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부흥을 맛보고 있는가?

오피니언·칼럼
설교
박진호 목사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구원은 골고다에 흘리신 예수님 보혈의 대속적 공로를 믿기만 하면 얻습니다. 다른 어떤 자격, 조건, 공적, 행위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과 본인 단 둘만의 인격적 체험적 대면을 통해 자기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을 얻었는지는 본인과 하나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제 삼자가 개입, 영향을 전혀 끼칠 수 없으며 객관적으로 구원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영과 영이 은밀히 교통하는 영역에서 이뤄지는 구원이기에 간혹 신자들 중에는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 확신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경우의 아주 명확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그에 합당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본문에선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나 금고가 발달되지 않아서 부자들이 보화를 땅에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간혹 보화의 주인이 묻어둔 채 죽는 경우가 있었는데 당시 유대 법은 밭의 소유주가 그 보물도 소유하게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화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당연히 밭 주인에겐 비밀로 했다가 모든 재산을 처분해 밭을 사선 보화도 함께 차지할 것입니다.

논외(論外)의 이야기지만, 농부가 밭의 원주인에게 보화를 발견한 것을 밝혀야 함에도 숨겼기에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불의한 예를 들었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비유에선 강조코자 하는 한두 가지 초점만 찾으면 되지 관련되는 곁가지 전부를 해석 적용해선 안 됩니다. 주님도 천국은 가진 재산 모두를 팔아서 반드시 차지해야 할 만큼 소중하다는 진리를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실감나고 쉽게 알 수 있는 비유로 설명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에 자기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다면 구원 받지 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신자는 종교적 행사에 모두 팔아서 바쳐야 한다고 오해해선 더더욱 안 됩니다. 구원은 분명 값없이 은혜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신자의 모든 것과 맞바꾸어도 될 만큼 최고로 값진 죽음이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구원 이후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의 죽음과 연관해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밭의 보물을 소유한 즉, 구원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나를 위한 죽음의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진짜 나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실제로 달려 죽었어야 할 자는 바로 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로 찌든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또 그래서 지금 나는 두 번째 인생을 살기에 실제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뿐입니다. 그분은 나의 진짜 주인이며 나는 그분의 종일 따름입니다.

또 다시 종교적 헌신을 강요한다고만 오해해선 안 됩니다. 이미 한 번 죽었던 자인지라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육신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야 합니다. 천국의 영광이 기다린다는 확고한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오히려 기뻐할 줄 알아야, 최소한 감사해 하거나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육신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사람과 죄악과 사단의 어떤 시험과 훼방에도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로 다시 산데다 장차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될 것이 확실한데 세상의 악함과 추함에 더 이상 굴복될 이유라곤 없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 속에 아직도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 있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늘의 영광을 소망해야 합니다. 또 그곳에 입성할 영광스런 모습을 그리며 이 땅의 흑암의 세력에 힘써 싸워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함께 하시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대신에 자신의 영적 실재(實在)가 여전히 너무나 연약하며 추하다고 그저 하염없이 비탄에 젖어있어선 안 됩니다. 신자?날마다 죽어야 함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승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옛 자아가 죽지 않고는 그분의 생수가 솟지 않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서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철저한 회개만으로 그치는 것은 주님이 정작 바라는바가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나서 악한 것과 맞서서 싸워 이기고 나아가 선을 적극적 자발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결국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이란 이 땅에서 죽음보다 더 큰 승리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물을 내가 사는 주위에 풍성하게 심어 나가야 합니다. 신자가 의를 행하는 것이 단지 죽음 후를 대비해 하늘에 공로를 저축하려는 목적이어선 안 됩니다. 천국의 보상은 오직 하나님의 몫일뿐입니다. 거기다 면류관이 이미 확실히 예비 되어 있기에 구태여 신경 쓸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신자는 단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기를 통해 다른 이에게 주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흘러 들어가게만 하면 됩니다. 자비, 긍휼, 용서, 온유, 인내, 경건, 정의, 진리, 평강, 자유, 소망, 사랑 등이 모든 인간관계와 일들을 이끌고 결말짓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재물, 권세, 명예, 체면, 위신, 기분, 자존심을 세우며 사는 인생과는 완전히 결별해야 합니다. 우리를 보는 자는 비록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해도 어쨌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도 천국의 향기를 어렴풋이나마 맡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아무 공로 없이 공짜로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신자 쪽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서 주었습니다. 우리로 그분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분, 자격, 능력, 위격 등에서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셨던 바로 그런 모습까지는 자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아 공짜로 영생을 얻은 이유입니다. 진짜로 그분이 내 대신에 생명을 맞바꾸었다는 사실에 의심이 없다면 이제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4,15)

바울 사도는 지금 십자가에 나를 대신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어찌 그분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신자를 강권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의무로 강력하게 요청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입은 자라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완전히 죽었습니다. 세상의 사형수도 왕이 사면해주면 그 왕을 위해 여생을 바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데다 천국의 영광을 보장해 놓았는데 어찌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농부가 바보 천치가 아닌 다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밭 값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련해서 수만금의 보화와 바꿀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을 자기 노력으로 쟁취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농부가 밭의 보물을 발견한 순간 이미 구원은 확보된 것입니다. 제 삼자는 전혀 개입할 수 없고 눈치 챌 수조차 없는 하나님과 자신만의 은밀한 언약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보화의 발견은 세상 사람에겐 감춰진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깨닫고 그 앞에 항복한 순간을 뜻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며 또 앞으로 덧입게 될 천국의 영광이 너무나 엄청남을 확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 이후의 삶은 그 보화를 땅에서 파내어서 집 안에 두고 갈고 닦고 감상하며 지내는 기간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푹 파묻혀 지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분과 세상의 어떤 것이나 혹은 전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할 경우는 당연히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또 정말로 그렇게 사는 자에게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곤 없어집니다. 정말로 죽음을 초월해서 날마다 주님의 손을 잡고 동행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이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님과 동일한 생각, 말,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작금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은 분명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가 가진 세상 보화를 더 늘리려고 하늘의 보화를 팔아 치우고 있습니다. 구원은 분명 값없이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너무 싱겁고 허전하고 초라한 것 같아 신나고 화려하고 멋진 것들로 채워 넣으려고 합니다. 거룩과 의로 덧입혀지는 새 사람이 될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처음 예수 믿었을 때는 옛 사람이 감정에 겨워 잠시 기절했던 것뿐이었고 이제 다시 깨워 일으켜 자꾸 살찌우려 합니다. 죽음을 초월해 사람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기는커녕, 세상 사람들과 함께 넓고 안락한 길을 가고 있느라 너무 비만해져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전후좌우를 아무리 둘러봐도 주님은 안 계신데도 종교적 활동 때문에 함께 하신 것 같이 여깁니다. 참 생수라곤 찾을 수 없는 사막 안에서 주님의 신기루를 보고 있을, 아니 스스로 신기루를 만들어 내고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옛 사람의 죽음은 요구하지 않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너무나 값싼 복음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이 밭에 묻힌 보화가 얼마나 값진지, 심지어 파묻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초월하기는커녕 지극히 작은 죄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의 체질이 연약한지라 새 사람으로서 자기 주위에 천국을 실현하는 일의 진척이 지지부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아무리 좁고 협착해도 얼마나 소중하고 은혜로운지는 확신해야 합니다. 십자가 권세가 내 옛 사람을 죽이고 주님 닮게 만들만큼 충분히 크기에 죄와 사단과 사망 앞에 맞서 싸우고는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부흥을 수치로 가늠하는 이상 복음의 바겐세일은 계속 행해질 것입니다. 해당 목회자와 교인들은 신날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진짜 덤핑입니다. 거기다 어떤 실제적 승리가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신앙이 죽음을 초월할 때만이 교회나 신자 개인의 참 부흥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교회는 지금 어떠한지요?

2011/9/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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