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골이 너무 깊다. 우리 사회는 아예 분열이 고질병 된 것 같다. 본문에도 심각하게 분열된 고질병 증세가 나타난다. 늘 그랬듯이 기적의 결과는 분열,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체험하고도 반응이 엇갈린다.
신앙의 반응
사도 요한은 먼저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45절). 나사로 부활 현장에 있던 유대인의 일부지만 요한은 그들의 수가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있는 것은 사도 요한이 “마리아에게 와서”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야기의 중심이 마르다였다. 그런데 여기 찾아온 유대인들이 마리아에게 왔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31절과 33절에서도 위로하며 울던 유대인들이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 서술한다. 아마 유대인들의 동정심이 동적인 마르다보다 정적인 마리아에게 더 집중되었던 것 같다. 마리아가 주도권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더 감정적이라 마르다보다 더 안쓰러웠을 수 있다.
여하튼 목격자들 가운데서 믿음의 결실이 생겼다. 본문에서 ‘그를 믿었으나’라고 하는 표현은 순수한 신뢰를 뜻한다.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이다. 그들의 신앙이 고차원적 신앙은 아니지만 전무후무한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우리가 나사로의 부활의 현장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언제부터인가 선거 때마다 ‘비호감 선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비호감 후보를 절대 찍지 말자는 거다. 그래서 피차 지지하지 않는 후보의 비호감 문제에만 집중한다. 고정관념과 이기적인 태도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깨고 이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신앙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다. 만일 고정관념이나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복음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신앙의 반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총선은 유독 범죄자 후보가 많은 선거였다. 699명 출마자 중 34.6%, 무려 242명이 전과자였고, 무려 전과 11범도 있었다. 70년 헌정사상 처음 보는 선거, 악이 선을 농락하며 범죄자들이 큰소리치는, 한 마디로 ‘파렴치 선거’였다. 사학자 윌 듀란트(Will Durant)는 자신의 저서 『문명 이야기』(The History of Civilization)에서 “국민의 도덕 수준이 지속적으로 쇠퇴하면 그 국가가 이룬 문명은 필연적으로 퇴보한다”며 로마제국이 멸망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도덕적 타락’이었다고 했다. 외부 공격을 받기 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모럴 해저드’(moral hazard), 도덕적 해이가 만연했다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양심을 '마음속의 거울'이라고 표현했는데 양심은커녕 너무 뻔뻔한 모습, 최소한의 죄의식도 없다. 부도덕한 행적으로 지탄을 받고도 태연자약(泰然自若), 과거에는 위장전입이나 음주운전 전력 하나만 드러나도 낙마했는데 ‘전과 3범’과 ‘전과 4범’이 당 대표로 활개친다. 결국 금배지까지 달고 자신들을 더 이상 수사하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고, 수사하는 검사와 재판하는 판사도 탄핵하겠다고 법안을 제출했다. ‘마음속 거울’이 깨진 시대, 나라가 망국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문제는 국민들 양심도 무뎌지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있다는 거다. 죄 사함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나사로의 부활 현장에 있다고 해도 신앙의 반응을 보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불신앙의 반응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부활하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에게 밀고한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6절), 고자질하는 쪼다들이다.
그 결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최고 회의가 소집됐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47절), 원래 대제사장은 1명 종신직이어야 하는데 그들은 편법으로 돌아가면서 대제사장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라 했다. 원수지간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였다는 것, 그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로마 정부에 빌붙어서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 백성들이 혹시라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받들어 임금으로 삼고 반란을 일으키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 정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으로 알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로마 정부를 싫어하는 바리새인들이지만 그들과 손을 잡는다.
바리새인들도 영적인 스승을 자부하며 살던 사람들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분노하며 사람 죽일 권한이 있는 제사장들과 같은 편을 먹는다. 정말 거룩하고 선량해 보이는 교활한 사람들이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때 항상 예수님의 적수는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런데 4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바리새파를 직접적으로 관련짓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이 대제사장 뒤에 숨어서 조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사로가 살아난 엄연한 현실을 수용하지 않는다. 죽음이 당연하고 현실이라고 믿는 자들은 새롭게 열린 부활의 세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게 그들의 한계다.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은 현실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가진 욕망과 편견, 그리고 집착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진리를 담고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반성하고, 행동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른 태도다. 그래야 생명이 주는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고, 평화가 주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나 부활 사건을 이생에서 경험하게 된 것은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교리나 전통으로 막는다. 절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해관계 때문에 진리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흔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 그래서 차라리 예수를 죽이는 것이 낫다는 태도다.
결국 대제사장들이 앞장서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들과 힘을 합한다. 공식적인 산헤드린 회의는 아니지만 임시 공회가 소집된다. 결의사항은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것(53절), 최고의 기적이 행해진 그 말부터, 그 엄청난 순간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노골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나사로의 부활이 그들에게는 결정타였기 때문이다.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의 완고한 저항이랄까? 예수님을 반대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라 확실한 기적을 아무리 반복하며 보여줘도 소용 없다. 감동과 변화는커녕 그들에게는 그저 적개심만 더 커질 뿐이었다.
가야바의 반응
사도 요한은 가야바의 반응을 특별하게 다뤘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가야바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다.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는 사도 요한이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라고 표현한 것은 그 해가 ‘운명의 해’, ‘온 세상의 구원이 성취된 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적인 표현이라 했다. 주후 18년부터 36년까지 약 18년 동안을 대제사장으로 재직한 가야바, 그는 사두개파에 속한 자로서 아주 교만하고 모략적 지혜가 많은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악연, 그는 공회의 수장으로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님을 심문하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고 총독 빌라도의 재판에 넘겨 사형을 집행되도록 하는 데까지의 모든 회의를 주도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 살해 음모의 주동자다.
그러나 그가 지금 떨고 있다(47-48절). 기적을 본 유대인들이 모두 다 예수 믿는 것이 두렵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비리, 불법, 허구가 다 밝혀질 것이고, 지금까지 지켜왔던 종교적 행위를 통한 자기들의 기득권과 이익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또 기적을 본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로마인들이 반란의 징조로 여기고 자신들을 문책하고 유대 나라를 더 강하게 탄압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가, 정치범으로 몰아 체포하기로 결의한다. 전형적인 정치논리다.
이렇게 예수님의 살해 음모를 주동한 가야바는 더 나아가 예수님 사형 판결자가 된다. 전임 대제사장이자 당시 유대의 영향력있는 실권자였던 안나스로 하여금 먼저 심문하게 한 후 가야바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이송되셨을 때 거짓증인까지 이미 준비해 놓고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재판을 진행해 사형을 판결한다. 원래는 당일 재판에서 사형판결까지는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사형을 판결한 것이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유대의 최고 행정기관이자 사법기관의 재판소이기는 해도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이송한다. 이 모든 일의 주동자가 바로 가야바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이런 말을 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50절), 가야바는 예수 한 사람만 제거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고, 거꾸로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AD 70년에 망하는 결과를 빚었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인 AD 90년에는 그도 공회원들도 다 죽었다. 하나님이 그 대적자들을 어리석게 만드셨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시2:1),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 헛된 일, 비웃을 일이라 했다. 너무 어리석은 거다.
가야바가 귀찮은 말썽장이를 제거하려는 정치적인 음모로 한 말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큰일을 예언하는 꼴이 되었다. 전문용어로 ‘쓰임 받은 것’, 가야바가 무심코 진리를 발설한 셈이다. 예수님이 12장에서 하실 ‘죽는 밀알’과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예수님이 유대인은 물론 온 인류, 그리고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다는 것(51-52절), 그러나 정작 이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가야바는 옳은 말을 했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말을 한 꼴이다.
그래서 쓰임 받는다는 게 꼭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다 들어 쓰실 수 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은 바로의 강퍅함을 사용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은 말을 안 듣는 발람에게 경고하시려고 그의 나귀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 진흙과 침도 사용하셨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 가룟유다도 쓰임 받았다.
혹시 쓰임 받고 있나? 그것으로 인해 자만하면 안 된다. 주님이 나를 쓰신다면 왜 쓰시는지를 아는 것이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핵심은 마음이고, 믿음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의 마음을 훤히 알고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문제는 불순종하는데도 하나님이 계속 쓰고 계실 때다. 그건 안심할 수 없다. 쓰임받고도 외면당할 수 있다(마7:22-23). 그래서 사역의 동기를 잘 살펴야 한다.
예수님은 긴급하게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으로 가신다(54절). 에브라임은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아무도 귀찮게 할 만한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 예수님은 그 조용한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다고 했다. 원래 어려운 때일수록 소수는 더욱 뜨겁게 뭉치는 법,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 결속력을 다지셨던 모양이다.
요한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한다. 절기를 언급하는 것은 요한이 즐기는 습관인데 참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시간이 가깝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유월절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그들은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던 바로 그때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56절), 여기서 ‘찾는다’는 말은 “쉬지 않고 미행하여”라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금년 명절에도 나타날 것이라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못된 사람들, 요한은 이런 반응은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유월절을 이용하여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고 체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 했다(57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죽을 뻔하고, 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지만 모함받아 감옥에 갇히고, 지혜로운 능력을 보이고도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요셉이 때가 되자 애굽의 위기를 극복하고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을 봐야 한다. 결국 가나안 땅에 심한 흉년이 들자 가족들을 살린다. 그때 요셉은 “근심하지 말라”며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셨다”(창45:5,7),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 그래서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신다”(창50:20절)고 했다.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을 때 형제들은 요셉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근에 대비하여 미리 보내신 것, 그래서 요셉은 좁은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사는 것”(합2:4), 믿음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어려운 시대라 할지라도 고난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