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칼럼⑮] 국가보훈과 국립묘지(9)

오피니언·칼럼
이범희 목사

국립묘지는 부채 의식을 확인하는 장소이다. 보답의 의미를 새기며 걸어야 할 곳이다. 보답의 본질은 기억이다. 국립묘지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동시에 과거와 미래 세대를 이어주는 곳이다.

현충탑과 위패 봉안관 뒤편에는 재일학도 의용군 전몰 용사 위령비가 있고, 그 뒤쪽에 제16묘역이 있다. 그곳에는 재일학도의용군 전사자 51위가 안장되어 있다. 아랫글은 위령비에 쓰인 추모의 글이다. 뒷면에는 전사자와 실종자 13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내 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역사의 책장 위에 꽃수를 놓으셨네/조국의 포근한 흙속에 웃으며 잠드옵소서.’

재일학도의용군의 참전 경위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경과한 8월 초순, 18세의 동포 소녀가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제 조국은 제 손으로 지키고 싶다면서 참전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

이 사실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알려지자 동포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여자라는 장벽을 무릅쓰면서 참전 의사를 보이는데, 남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용기를 상실한 것이라는 질책이 쏟아졌다.

1950년 8월 8일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민단)은 도쿄 중앙본부에 지원병 지도본부를 설치하고, 전국 지부에 관련 지침을 내려보내고, 주일 대표부(공사 김용주)와 긴밀히 협의를 하면서 맥아더 사령관에게 참전을 허가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최고 사령부 앞에서 연좌농성과 피켓시위에 혈서까지 쓰면서 수차례 탄원서를 냈지만 거부되었다. 이들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공산주의의 위장침투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9월 초 맥아더 사령관은 재일동포의 참전을 허락하고 영어통역이 가능한 1천 명을 모병하였다. 인천상륙에 투입할 통역병과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0년 9월 7일 재일동포 청년들이 사이타마현 아사가의 미 제1기병단에 입소했다.

그리고 9월 13일 요코하마 항에서 제1진 69명이 수송선 피닉스 호에 탑승해서 행선지도 모른 채 출발했다. 미군의 군복을 입었지만 부대마크, 계급, 군번도 없이, 단지 ‘S.V. FroM JAPAN’이라고 적힌 견장을 달고 있었다.

이틀 뒤 새벽 인천 앞바다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와 함께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아사가 기지에서 491명, 규슈 오이타현 벳푸 미8군 3사단 캠프에서 훈련받은 151명이 시세보 항에서 미군과 함께 LST(Landing Ship Tank)를 타고 부산을 경유하여 원산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 참여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 위령비와 제16묘역

이렇게 1천여 명의 지원자 중에서 여성과 불합격자를 제외한 642명이 참전하였다. 대부분 일본에서 고교나 대학에 다니던 엘리트 청년들이었다. 고국이 없어질 판인데 일본 땅에서 나라 없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서러움과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 참전의 이유였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미 제7사단 17연대와 31연대, 제3사단 제7연대, 15연대 미 공군 6보급부대, 45부대, 60부대, 제92화기중대, 국군에도 배속되었다. 이들 부대는 38선을 넘어 북진한 부대로 평양을 탈환하고 신의주,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135명이 전사, 실종되었고 부상자도 많았다.

생존자 507명 가운데 265명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242명은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이 임의 출국자로 규정하여 재입국을 거부함에 따라 국내에 남겨졌다. 이들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이산가족이 되었고, 어려운 생활고에 내던져졌다. 1968년 원호법 개정으로 비로소 작은 혜택이 주어졌지만, 일본 거주자는 1985년부터 소액의 보상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6일 전쟁)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자진 귀국하여 참전한 것을 두고 유대 민족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지만, 우리 재일학도의용군은 그보다 23년 앞서서 뛰어난 용기와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이스라엘 유학생들과 처지가 아주 달랐다. 부모·형제와 생활 터전이 일본에 다 있었다. 오직 순수한 조국애로 전선에 나선 것이다.

재일 동포들의 모국에 대한 공헌은 대단하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총 외국인 투자액의 절반을 차지했고, 제주도 감귤농업과 최초 수출단지 구로공단 설립을 주도하고 투자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780억 엔을 송금하고 300억 엔의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우리 경제에 숨통을 터 주었다. 최초의 순수 민간은행인 신한은행도 100% 재일동포의 출자로 세워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100억 엔(541억)의 성금을 기부했고, 체조, 수영, 테니스, 조정경기장과 올림픽회관 등이 이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 1948년 런던올림픽은 이들의 지원으로 출전했다. 유니폼의 태극기도 동포 여성들이 직접 바느질했다. 1970년 오사카 세계박람회 참가도 50만 달러를 모아서 한국관을 건립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과 9개의 공관도 재일동포들이 세웠고, 민단의 부인회는 7년간 우수리(잔돈) 모으기 운동으로 16억 4천만 엔을 모금하여 수세식 화장실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와 같이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학도의용군의 참전과 경제적 지원으로 모국의 발전을 위해 큰 공헌을 했다. 우리는 은혜를 잊지 말고 국가는 보훈으로, 국민은 보은으로 이분들을 기억하고 함께해야 한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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