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도 개인의 일상적 측면
목회자의 설교나 강의를 통해 공공신학에 대해 배웠다면, 이제 성도 개인은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공공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필자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실천의 내용보다는 실천의 태도와 자세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유는 개개인이 처한 맥락과 상황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한두 가지 사례를 제시할 수는 있어도, 전체를 나열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성도가 일상에서 공공신학적 삶을 실천할 때, 기억해야 할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이 글의 취지인 ‘성도 개인의 측면에서 공공신학적 실천과제’를 달성하고자 한다.
1) 듣는 데서 시작하자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팀 켈러는 뉴욕 리디머 교회를 목회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한 성도들의 공공신학적 실천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고 서술한다.
“동네 사람들이 가장 고질적이고 심각한 걸림돌로 여기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기 위해 무얼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은 대답을 듣기 시작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반응은 지극히 만족스럽다. 백이면 백, 교회에서 찾아와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를 놀라워했다. 교회를 포함한 종교단체들은 대부분 지역사회에 뭐가 필요한지 잘 안다는 자세를 보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다면, 자기 생각에 상대가 필요한 것을 주기 전에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예수님도 도움을 청하러 온 자들에게 곧바로 병 고침이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 아니라, 먼저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41). 성전에서 선생들과 얘기할 때도 예수님은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말하기도가 아닌!) 하셨다(눅 2:46). 그분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셨고, 그 이면의 내용까지 듣기 위해 물으셨다. 진정한 경청의 모본이다.
청년사역네트워크가 ‘기독교에 대한 청년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기독청년 79%와 비기독청년 80%가 개신교의 배타성이 높다고 답했다. 기독교가 믿는 진리는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배타적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온유와 겸손, 상대에 대한 존중과 경청이 요구된다(벧전 3:15). 이러한 자세가 결여될 때, 기독교는 강압적이고 승리주의적인 인상을 비신자에게 남겨 그들의 마음을 닫게 할 것이다. 세상을 변혁하기 전에, 상대에게 도움을 주기 전에 먼저 상대의 필요를 들어야 한다.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응시하며 듣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들어야 한다.
2) 있는 데서 실천하자
비즈니스 선교사(BAM, Business As Mission)로 ‘핸즈커피’ 기업을 운영하는 진경도는 “대표님 이 비즈니스를 해서 뭘 하고 싶으신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 비즈니스 자체가 본질적 가치이고,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정직하게 일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고, 고객들을 섬기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 있지, 비즈니스의 결과물로 더 중요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 따라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다. 노동을 저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거듭난 신자가 견지해야 할 성경적 노동관은 노동(직업) 자체를 소명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칼빈의 직업소명설에 잘 드러난다. 마르틴 루터도 “하나님은 소젖 짜는 하녀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우유를 짜고 계신다”고 말했다.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현장이다.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는 세상 일, 직장 일 조금 덜 하더라도 교회에 충성 봉사하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히 번 돈으로 선교나 구제를 힘쓰도록 은근히 조장하였다. 결국 노동과 직업 자체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지요, 소명이라는 인식은 희미해지고, 주의 일과 세상일을 구분짓는 성속 이원론을 부추겼다. 직업 자체를 이웃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관점을 가진다면, 훨씬 주도적이고 활발하게 공공신학적인 실천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 전달을 넘어서 그들의 마음과 성품을 빚어가기 위한 수업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배관공은 탁월한 기술을 연마하여 막힌 곳을 뚫고, 새는 곳을 막아서 이웃의 불편을 해소해 줄 것이다. 의료인들은 정부의 의대생 증원 정책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자신의 은사와 소명과 사명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이 사안을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된 현장의 종사자들을 탐방하고 인터뷰하며 다양한 공공신학적 사례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난민을 고용한 커피숍 점주, 탈북민에게 창업교육과 지원을 돕는 단체, 청각장애인 택시기사, 지역 문화를 발굴하고 홍보하도록 돕는 스타트업 임원 등 무궁무진하다.
성도 개개인이 공공신학을 실천하기 위해 신학교를 가거나 이직할 필요는 없다. 선교지에 가야 하거나, 거창한 프로젝트, 막대한 재정을 헌금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 자신이 출근하는 회사, 그곳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현장이요, 매일 부대끼는 동료들, 그들이 복음의 공공성을 증거 해야 할 이웃이다.
3) 균형감을 유지하자: 은혜, 정의, 지혜
공공신학을 작동하게 하는 핵심가치는 은혜와 정의다. 언뜻 보기에 둘은 상호 대치되거나 모순되는 개념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신비 안에서 놀랍게 통합된다. 팀 켈러는 신명기 15장을 주해하면서 가난한 자를 위한 채무탕감이나 선택적 복지와 같은 하나님의 강력한 공공정책이 가난한 이들에게 너무도 관심이 깊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하였다고 말한다. 즉, 정의의 기초가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라는 것이다.
그분의 너그러우심, 그리고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이야말로 정의사회를 떠받치는 주춧돌이다.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들의 규정과 규칙이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하나님이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시고 그분의 거룩한 법으로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의를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 구석구석까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신자는 자신의 삶에서 공공신학을 실천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균형적 모본을 따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요 1:14). 공정과 정의만을 강조한 나머지 은혜와 자비가 메마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역으로 풍성히 베푸는 은혜가 수혜자의 자존감을 손상하거나 자립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로버트 룹튼은 서구 교회의 지혜롭게 베풀지 못한 공공신학적 호의가 어떻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도리어 해악을 끼쳤는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난 50년 동안 1조 달러의 자선기금이 아프리카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50년 전에 비하여 훨씬 나빠졌다. 기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자선이 가끔 가장 무책임한 자선으로 되고 있다. 우리의 무료 급식과 무료 의복이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감은 무너뜨리고, 그들의 의존도는 높였다. 그러한 행동에 대하여 니카라과 한 지도자는 ‘우리를 거지로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가장 친절하게 그들을 무너뜨리는 방법이다. 우리의 좋은 의도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자선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이다.
룹튼의 지적을 고려할 때, 우리는 공공신학의 실천적 자세로 최소한 3가지를 고려해야 함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은혜롭게, 정의롭게, 지혜롭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자, 수혜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장애인은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이 아니라 자립입니다.” 탈북자는 말한다. “돈 이전에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경청은 신자 개인의 공공신학적 실천이 은혜와 정의에 기반하여 지혜롭게 이루어지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Ⅲ. 나가며
2010년 이후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가 한국 신학계와 한국교회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공적 역할과 대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은 한층 고조되었다. 표면상, 수치상으로는 기독교가 감소 추세를 보이는 것이 분명하지만, 교회가 세상의 이러한 요구와 기대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기독교는 쇠퇴기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성숙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를 위하여 논자는 한국교회의 공공신학적 실천과제를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하였다. 첫째, 목회자의 설교적 측면에서 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선명히 드러내는 설교, ② 칭의와 성화를 균형있게 강조하는 설교, ③ 성경적 종말론에 기초하여 문화명령과 재림신앙을 강조하는 설교, ④ 지시하는 설교가 아닌 공감하는 설교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둘째, 교회의 대사회적 측면에서는 ① 지역사회와 호흡하는 교회, ② 상식이 통하는 교회, ③ 복음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교육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자고 했다. 셋째, 성도 개인의 일상적 측면에서는 ① 듣는 데서 시작하자, ② 있는 데서 실천하자, ③ 은혜롭고, 정의롭고, 지혜롭게 실천하자고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며 제시하였다.
이 글은 교회가 주도하는 공공신학적 사례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들이 지역사회에 어떤 효과를 미치고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질적 연구가 포함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울러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지자체나 NGO 단체들과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델에 대한 연구를 기다린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공공신학”이라는 용어에 생경하며, 일각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사회 복음으로 경계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어온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여 세상의 참된 소망이 되는 성경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신학적 논의와 실천적 모델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올해는 한국교회 성장과 부흥의 한 축이 되었던 74엑스플로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4차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해이기도 하다. 믿음의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수해 주어야 할지 교회는 역사적 과제와 시대적 도전 앞에 서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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