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 썩 한 獅子門(사자문) 城壁(성벽) 밖, 뒷길 따라 먼지 이는 길목을 돌아 廣場(광장) 안쪽으로 접어들어 비탈, 山언덕 넘어 조용한 둔덕에 올라서다
곁 가에 작은 돌문 아래 펼쳐진 네모 진 널따란 地下(지하), 학교 교실만한 토굴 灰石(회석) 창고
아리마데 요셉의 포도주 적재 창고(積財 倉庫)에 내 視線이 닿아, 율법사로서의 부요(富饒)를 눈길 챌 만큼, 소유한 무덤의 제공자로 증언 되고도 남는데, 主의 시신을, 빌라도로부터 받아 내어 안장(安葬) 할 만한 권한자로서도 짐작이 간다.
흙 돌의 땅 아래 속으로, 자그마한 토굴 안에 들어 거룩한 主의 몸이 안치 되었던 자리에, 봉함했던 돌문은 어디 메로 굴렀나. 무릎 꿇어, 한 동안 머리 숙여,
굴밖에 나와 서야 視野(시야)에 드는 건너편 산자락 횅하게, 세 개의 바위구멍 해골처럼 뚫려 골고다 언덕 위. 작은 나뭇가지 사이로 아마도 거룩한 십자가 서있었을 것이었겠다.
내 온 몸 덩이가 온통 허물어져서라도 다 하여, 가누지 못 할 무거운 이 짐을 허물어 뜨려 조용히 나는 내려놓는다. 내 몸 무게 만 한, 아니 그보다 더 무거울 祈禱(기도)로서 내려놓는다.
주님, 묻히셨던 무덤 가로, 찾아가는 길목은 천근만근의 무계 눌림 같은 발걸음의 디딤이었습니다. 앞 쪽으로 발 내 디뎌내기는 하였는데, 자꾸 마음속에서는 제자리걸음 느낌이었습니다. 왜 이분은 은총의 하늘 보좌 자리를 박차고, 인간의 말 그대로 골육상쟁 세계 속에 찾아 오셔야만 하셨을까. 세계 역사는 아무리 깊은 숙고를 거듭해 보아도, 의미 없이 지고 또 지는, 자연의 조화이기만 한 것은 아니게, 세월 더하여 갈수록, 아니 짧은 한 인생의 뒷자리로 돌아보아도, 또 아무리 명철을 자만하는 그 누구의 생애였어도, 그렇게 의미 없이 끝내버리는 세상 일 수는 없다고, 다짐을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21세기의 기복(起復)을 흘러, 흘러 왔습니다. 어린 아이이거나, 어느 어른의 개개인의 작은 숨결 소리 호흡 속에서도, 역시 신비의 작업이 움지 적 거리고, 저 하늘의 구름들이 산 계곡을 넘나들 자연 빛 그 밖에서도 또 신비, 바다와 山間에 흘러 떠가는 구름자국 비치는 신비의 작업 역시, 광활하게 시간을 넘나들어 넘어와서는 약동(躍動)을 하는데, 그 안에는 진실의 세계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우리들 눈앞, 大 作業으로 움직여주고 있음, 아니겠느냐고, 신앙생명 지혜 다하여 소리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