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9) 예수께서 우셨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11:28-37
이희우 목사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부활로 바꾸시더니 갑자기 분위기가 다시 장례식 분위기로 돌아간다. 죽음이라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KJV으로 보면 “Jesus wept”,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짧은 절이다.

우실 분이 아니다. 죄를 지은 분도 아니고, 약한 분도 아니다.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이시다. 먹을 게 없다고 우신 적도 없고, 사람들과 논쟁 중에 억울하다고 우신 적도 없고, 매를 맞으면서도 우신 적도 없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실 때도 우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신다. 사나이는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 우신다. 자신의 문제로 우신 게 아니다. 그 둘 중 한 번이 본문,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신 거다. 또 한번은 예루살렘 입성 때 우신다(눅19:41). “예수께서 우셨다”, 그 모습과 의미를 살펴본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셨다

무대는 삼 남매의 집 밖이다. 마리아가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선다(31절).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나갔다(32절).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땅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와 같은 고백을 하며 운다. 따라온 사람들도 울었다(33절). 자연스러운 울음,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는 당시 풍습이 무제한 방성대곡(放聲大哭)이었다고 한다. 엄청 울었을 거다. 그런데 같이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우리 시대는 눈물이 없다. 눈물이 메말랐다. 비극이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감동과 눈물을 흘리는 일에는 소극적이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하고 공포에 떠는 데도 남의 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팔레스틴 민간인들도 마찬가지다. 같이 울며 전쟁이 중단되게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본문의 예수님도 우셨다는 표현이 감동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기록했다. 33절에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는데 38절에서 또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라고 했다. 레온 모리스는 이 눈물이 마리아나 유대인들의 방성대곡과는 다른 동사,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것으로 조용히 흘리시는 눈물”이라 했다.

예수님의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 슬퍼하는 사람들로 인한 눈물이자 그 슬픔에 동참하는 위로의 눈물이다. 사랑하는 오라비를 잃고 살길이 막막해서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우는 두 자매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처한 인간의 고통을 보고 같이 우신 것, 인간이 당하는 죽음의 현실에 공감하신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사륵스(σάρξ)가 되셨다. 이는 중립적 의미의 몸(σῶμα, 소마)보다 더 세상성에 얽혀 있는 단어로 육으로 번역된다. 말씀이 완전 진흙덩이가 되신 거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구름 타고 다니셨나? 아니다. 걷다가 피곤해 우물가에 앉아 쉬기도 하고, 배고프고 목이 말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 좀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셨다. 죽음의 고통도 겪으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셨다는 것이 기독론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고 계신다. 인간 예수, 딴 세계에 추월해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고 같이 신음하고 같이 고통당하며 같이 우시는 신(神), 그러면서 함께 문제를 풀자고 하신다. 앞장설 테니 따라오라고 부르신 것, 그래서 위로가 되신다. 사람들의 위로와 다르다. 사람들의 위로는 잘못하면 욥의 친구들처럼 정죄로 바뀔 수도 있고, 비난으로 바뀔 수도 있다지만 예수님의 위로는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 슬픔을 달래주는 사랑의 위로다(계21:4). 함께 울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한 마디가 모든 상황을 바꿔놓는다. 나사로 입장에서는 “귀찮게 왜 깨우실까?” 그랬을지 몰라도 초상집이 잔칫집으로 바뀐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곡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썩은 냄새를 풍기며 수족이 베로 묶인 채 누워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오는 기적을 부르는 눈물이다. 눈물을 기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값진 눈물, 예수님은 우셨다.

신앙으로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묻는다. 죽음은 고독한 것일까? 아직 죽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으니 천사가 와서 그의 영혼을 데리고 아브라함 품으로 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이 고독하지 죽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큰일로 보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 살다가 생기는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일까? 스데반의 순교도 그저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게 전부, 이 한마디로 끝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장면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게 전부다. 야곱에 대해서도 그랬다. ‘나이 많고 기운이 진하여 열조에게로 돌아가니라’, 너무 간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사람을 절망케 한다. 죽은 나사로는 말이 없고, 장례식장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자들에게도 죽음은 마치 무(無)로 돌아가는 것 같은 공포였다. 불가타 성경(Vulgate)을 번역한 제롬(St. Jerome)이 재미있는 사실을 기록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예수님께 “나 또 죽나요?”라고 물었고, 예수님이 “그래, 너 또 죽어” 그러시자 충격을 받은 나사로는 일생을 고지방에 가서 전도하며 헌신하며 사는데 그때부터 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나사로를 살리신 건 살린 것이라기보다 두 번 죽이는 것처럼 죽음을 괴로운 것으로 썼다.

마태는 예수께서도 죽음을 앞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죽음을 미리 앞당겨 걱정하며 산다. 어쩌면 항상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키르케고르(Soeren Kierkegaard)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자”라고 규정했을까?

고대의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는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다”며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고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현실이고, 위압적이다. 죽은 나사로, 수족을 베로 단단히 묶어 놓았다(44절). 우리나라도 수족을 단단히 묶는데 대부분이 화장이라면 사실 이렇게 단단히 묶을 이유가 없다. 바뀌어야 한다. 관도 좋은 것 쓸 이유가 없다. 태워지고 말 것, 낭비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노후 준비 없는 장수는 재앙”이라며 “재수 없으면 100세 넘게 산다”는 말이 생겼다. 죽을 나이 되면 죽어야 한다는 거다. 이 경우 죽음은 불행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젊어서 죽으면 안타깝고 슬프지만 진시황(始皇帝)이 꿈꾸던 영생불사(永生不死)가 정말 행복일까? 우리는 몇 살까지 살아야 만족할까? 100세? 아니면 120세? 문제는 오래 사는 것보다 늙는 거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몸도 골골대고, 할 일 없이 무력하게 100년 넘게 살면 무슨 행복이 있을까?

가끔 “빨리 죽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라. 하나님께서 알아서 부르실 것, 고종명(考終命)이 중요하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 했는데 언젠가 반드시 죽음 앞에 선다면 죽기만 기다리기보다 정신 차리고 삶의 질을 최대치로 높여야 한다.

이제 무대를 예수님이 가셨던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옮겨본다. 사도 요한은 무덤에 가실 때 예수님이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다고 또 다시 예수님의 감정을 언급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38절),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로 번역한 ‘엠브리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는 그저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픈’ 감정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나사로에 대한 사랑 표시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분노하다’는 의미도 있다. 많은 학자들은 오히려 이때 예수님의 감정을 ‘분노’라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의 비통은 절망의 비통이 아니라 분노의 비통이다. 인간을 절망으로 모는 죽음에 대한 분노, 여전히 그 죽음의 위력 앞에서 신앙으로 이기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생을 향한 분노라는 말이다. 친구가 불쌍하고 두 자매가 불쌍해서 우신 것이 아니라 무리의 몰지각이 답답해서 분을 내셨다. 안다고 하지만 너무 모른다는 게 주님의 생각, 그래서 화나고 답답해서 우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분하고 억울하시다. 그런데 그거 아나? 우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예수님을 비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기억하라. 예수님이 우신 것은 죽음에 대한 분노였다.

눈물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다

살면서 가족을 잃는 상실은 너무 큰 슬픔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열두 살 된 딸이 병들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달려가 살려달라고 했고, 예수님이 그 회당장의 집에 가는 도중에 딸이 죽는다.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다. 집안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죽은 딸에게 손을 대시며 “달리다 쿰”(ταλιθα κουμι의 아람어)하신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이다(41절). 아이가 살아났다. 눈물이 기적을 불렀다.

또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 성에 사는 한 과부의 외아들 청년이 갑자기 병들어 죽었다. 사람들이 시신을 들고 공동묘지로 가는데 과부가 상여 뒤를 따라가며 통곡한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고 말씀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다. 살아난 것, 눈물이 기적을 부른 것이다.

개그맨 백재현 씨는 수년 전 뮤지컬 연출자로 돌아서 기획한 공연이 대실패로 끝났다. 쫄딱 망했고, 빚 독촉이 빗발쳤다. 백씨는 울다가 죽으려고 소주 일곱 병을 마셨다. 그런데 깨어났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던 그가 선배 개그맨 전유성 씨에게 전화했는데 그때 한 전유성 씨의 충고 덕분이다. “인마 웃어! 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거 웃긴 거야”, 백씨는 그 말을 듣고 털고 일어났다.

1997년 영국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교통사고로 죽자 영국 국민은 비탄에 빠졌다.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 한동안 영국의 정신병원에 우울증 환자 방문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유는 실컷 울고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를 ‘다이애나 효과’(Diana effect)라고 부른다. 눈물이 치료제, 울 때 우리 몸에서 자연스럽게 진통제라고 불리는 프로락틴(prolactin), 류신(leucine)의 분비를 촉진시켜 통증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잘 우는 사람은 병에 덜 걸린다고 한다. 미국에서 건강한 사람과 위궤양이 있는 환자를 조사했더니, 건강한 사람들이 우는 것에 대해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주 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울 때는 소리 내서 우는 사람이 심장병 발생률이 더 적다고 했다. 의학적으로 양파를 썰 때 나오는 눈물보다 슬픈 영화를 볼 때 나오는 눈물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더 많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눈에 뭐가 들어가면 갑자기 눈물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또 눈물을 흘릴 때 우리 몸에서 피로나 우울증, 불안감을 유발시키는 망간이 배출되기 때문에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치유의 정화수, 슬프면 울어야 한다. 자주 웃는 것만큼 잘 우는 것이 면역력 유지에 중요하다. 엔돌핀(Endorphin)도 많이 생성된다. 남자의 평균수명이 여자보다 짧은 이유는 남성이 여성보다 덜 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컷 울면 괴로운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된다. 그래서 제대로 울지 않으면 몸이 대신 앓는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울게 만든 마리아의 눈물과 따르는 사람들의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라 부활의 기적을 만들어낸 눈물, 그 눈물은 믿음으로 발전한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믿음의 힘에 대해 말씀하셨고,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신앙을 고백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 물으신다. 믿음이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말씀이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부활, 이제는 믿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믿음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서 일어나는 실재임을 믿으라”고 하신다.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기적을 보고,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래야 부활 생명으로 살고, 그래야 장차 부활 승리의 실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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