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 무렵 우리나라는 강대국 외세의 압력과 세계적인 식민지 쟁탈로 인한 약소국으로 파행을 걷고 있었다. 국내적인 정치적 혼란과 파당 싸움으로 국민들은 극한 경제적 가난과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연속이었다. 특히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대국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과 미래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 그 시대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섬마을을 떠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1879년에 태어난 이자익이다. 7세에 고아가 된 그가 배고픔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마을 곁에 있는 냇가로 가서 물을 실컷 마시고 얇은 돌을 멀리 던지며 놀이 삼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던 청소년 이자익은 17세가 되던 해에 걸어서 전라도 전주까지 오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일을 찾던 그에게 숙식이 가능한 갑부집이 있다는 소문을 따라 도착한 곳이 전북 김제에서 제일가는 금산 지주 조덕삼의 집이었다. 이자익은 주인을 만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마부로 채용해 주길 청했다. 후덕하기로 소문났던 지주는 그를 마부로 받아주었다.
조덕삼의 아들이 훈장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자익이 엿듣고 있는 것올 본 주인은 방 안으로 그를 불렀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자익은 조심스럽게 그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주인 조덕삼은 마부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천자문을 외울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안심한 자익은 단숨에 천자문을 외웠다. 자익의 총명함을 발견한 주인은 그의 아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한자를 터득할 수 있었다. 조덕삼은 일자무식이었던 그를 지식과 인격을 갖춘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L.B Tate, 테이트)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조덕삼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저택은 말이 쉼을 가질 수 있는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덕삼은 선교사와의 만남으로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인생 상담을 받았던 주인은 즉시 사랑방을 내어 주었고 오래 가지 않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점점 교인들이 많아져 집회를 할 곳이 좁아 교회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조덕삼은 과수원의 땅을 교회 부지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성도들과 함께 합력하여 ㄱ자 금산교회를 완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당회장인 최의덕 선교사는 교회의 일꾼이 필요하니 세례를 받은 교인들 중에 영수를 세우자 하여 투표가 있었다. 주인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이 선출이 되어 교회와 교인들을 볼보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안정이 되자 교회의 살림과 선교사를 대신하여 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 장로를 선출해야 했다. 장로 선출 투표가 있었다. 그런데 교회건축에 헌신한 지주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의 하인인 마부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교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 조덕삼 영수는 “나보다 더 신앙이 좋고 교회를 이끌어 갈 이자익 장로님을 우리가 잘 섬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갑시다” 라며 성도들을 오히려 설득하였다. 양반과 하인의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그 시절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주인 조덕삼을 통해 진정한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닮은 것이었다.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교인들이 성장하였고 조덕삼 영수는 후에 장로로 피택 되었다.
주인 조덕삼 장로는 마부 출신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생활비 전부와 필요한 모든 학비를 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자익 장로는 한일합방이 있었던 해에 입학하여 5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고 1915년 6월에 평양신학교 8회 졸업을 하였고 당당히 목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어려움 속에 있었으나 주인의 도움으로 역전의 인생을 한 그는 자신이 신앙생활 하였던 김제 금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과 6.25 한국전쟁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또한 이자익 목사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오가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전북노회, 대전노회 등 여러 노회를 설립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4년 함경도 함흥에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13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7년 33회, 1948년 34회 총회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였다. 전국 노회의 총대들에게 신임을 얻었고 가장 어려웠던 일제시대와 6.25 한국전쟁 전후로 한국교회에 지대한 헌신을 하였다.
140년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이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가 있을까? 이자익 목사는 목회자, 선교사, 대전신학대학교 설립자인 동시에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선교부와 목회자들에게 신망을 받았던 사역자였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 등 입각 제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거절을 하였고 남은여생을 생명의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생명사역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실망과 좌절에 빠진다. 더 나아가 원망과 불평이 몸에 배여 있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자익 목사는 고아의 신분을 극복하였고 하인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배우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성품과 신앙이 좋은 조덕삼 주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에 평생을 보냈다. 그는 노회장과 신학교 교장, 그리고 총회장 등을 거치면서도 오직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원에 자신을 드렸다.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한 이자익 목사는 1958년 79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어느 때 보다 한국교회가 혼란하다. 급기야 사회적,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신앙이 건강한 크리스천들이 더 많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소망이 있다. 성령과 말씀이 이끄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기독교가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신앙의 선배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의 아름다운 관계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으로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어려운 이 시대를 극복해 가는 통찰과 지혜가 있기를 기대한다.
인생의 행복은 높은 학벌과 넉넉한 물질을 소유한 이들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고아로 자라면서 하인의 신분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신실한 태도가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남이 중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실망과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기억하자.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만나면 역전의 인생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란다.
#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