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장례는 이미 끝이 났다. 중동지역은 기온이 높기 때문에 흔히 사망한 바로 그날 굴속에 매장하는데 이미 나흘,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인 두 자매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많은 유대인들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장례식 내내 중동 여인들 특유의 애곡 소리가 집안을 울렸을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중대 선언을 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절). 예수님의 그 유명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ἱμί), ‘I am’ 선언이다.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에 이은 다섯 번째 ‘I am’,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선언을 하셨다. 요한복음 11장의 주제를 ‘죽음에서 부활로’ 바꾼 선언이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에 머물면서도 나흘 뒤에 도착하신 예수님, 요한은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즉시 뛰어나가 맞이한 반면에 마리아는 그때 “집에 앉았더라”라고 비교되게 기록했다(20절). 마리아가 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누군가 상주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늦게 오신 예수님께 삐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는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마르다는 그 집안의 주인이라 먼저 전해지면서 주인 노릇한 것으로 보이고, 마리아가 앉아 있었던 것은 조문객이 찾아올 때 유족이 앉은 자세로 대하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르다가 활달한 반면 마리아는 조용하고 생각이 깊은 성격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아에 비해 뛰쳐나가 영접한 마르다가 그래도 언니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 마르다도 어쩔 수 없이 원망하듯 한마디 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32절에 보면 마리아도 똑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이 말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수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라도 대단한 믿음이다. 마르다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라고 했다. 난해한 구절이다. 표면상으로는 지금이라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시다는 뉘앙스, 마치 나사로를 깊은 잠에서 깨울 수 있으시다는 기가 막힌 고백 같다. 하지만 예수님이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옮기라고 하셨을 때 벌써 냄새난다며 극구 반대한 사람이 마르다인 것을 보면 그저 원망조로 말한 것이 좀 쌀쌀맞았다 싶어 자기 신앙은 이렇다고 한 말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였다.
어찌보면 죽음을 무시하는 듯한 엉뚱한 말씀 같다. 그리고 언제 다시 살아나는지 시기가 모호하다. 반면에 이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은 정통 신앙인의 대답이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죽음을 대하는 무리의 반응은 절망이거나 두려움이고, 제자들마저도 무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마르다는 소망으로 죽음에 맞서는 신앙인의 전형적 유형으로 반응했다. 부활 신앙의 소유자, 예수님의 말씀에 먼저 동의했다. 비록 지금 살릴 수 있다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했어도 멋지다. 상당한 신앙, 제자들보다 더 멋진 신앙고백을 한 셈이다. 결국 마르다의 이 답변이 요한복음의 사상 중 가장 위대한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선언을 유도한다.
하지만 지금 곧 살아날 것으로 믿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당한 수준의 믿음인 것은 틀림없으나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믿음은 나의 생각, 나의 방법, 관례 같은 것과 주님을 맞바꾸는 것이다. 상당한 믿음이기는 해도 아직은 모자라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들은 똑같이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주님께 원망 석인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멋지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아멘”, “믿습니다”라는 대답이다. 이 대답은 원문에서 강조되는 것이 “내가…”라고 한 부분이다. “내가 믿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었다. 막연한 신앙이 아니다. 형태가 없는 경솔한 행위도 아니다. 그녀의 신앙에는 내용이 있다.
레온 모리스는 마르다의 이 고백에 확실한 3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바로 그 메시아라는 말이다. 둘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생난리를 쳤는데 그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그리고 셋째는, 세상에 오시는, 즉 지금까지 오래 기다린 구원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고 성취하도록 보내신 분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기독론을 너무 잘 요약한 최고의 신앙고백이었다는 뜻이다.
이 고백을 보면 너무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인간적인 섭섭함과 원망하는 마음도 살짝 엿보이지만 그녀의 신앙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항상 나는 전능하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시고는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외면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비록 지금은 죽어도 종말 때에는 몸의 부활이 일어나고 그때에는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것, 옳은 고백이고 멋진 고백이다.
그런데 말씀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이 신앙고백이 꼭 맞는 고백은 아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생각이 다르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을 계획하시고 마르다는 ‘종말 때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나사로를 바로 살리신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조직신학 교수께서 종말의 부활은 다시 죽는 것이 아닌데 나사로는 살아났다가 다시 죽었기 때문에 ‘부활’이 아니라 ‘소생’ 정도라고 하셨지만 ‘소생의 기적’이 아니라 ‘부활의 기적’으로 보고 싶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을 소생의 기적이라 보고,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째 되어 살아났기 때문에 부활의 기적으로 보자는 뜻이다.
그리고 나사로가 다시 죽은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절망의 현장에서 다시 살리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분다우셨던 예수께 집중해야 한다. “내가 곧 부활 자체, 생명 자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결코 선언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그저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면 그 이름을 타고 예수께서 우리 의식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만 부르고, 예수님을 묵상만 해도 우리 마음이 기쁘고 삶의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이것을 요한은 성령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63). 말씀을 타고 성령이 역사하고 실제 우리 안에서 생명 현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말씀’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 그래서 생기는 생명의 힘이 우리 죽을 몸도 살려낼 것이다. 이게 부활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라 하시고, 생명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말씀의 힘을 믿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예수님은 죽은 몸도 살리시고 죽을 몸도 살리신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가져야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요한복음 내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믿음의 핵심, 믿는 자에게는 부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의 고백이 훌륭하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마르다는 이렇게 훌륭한 고백을 하면서도 이 믿음의 힘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마르크시즘 철학자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이라는 책에서 믿음의 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나 우리 인생에는 사건이 은총처럼 부어지는데 그 사건에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 아니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이나 무엇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이라며 “그 사건이 진리임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사랑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소망”이라 했다. 진리를 진리 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의 힘이다. 맹목적인 것 같은 이 믿음이 역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다의 부활 신앙의 실현이 종말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절), 이 말씀 중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게 당장 실현된다는 것이다. 엄청난 일이다. 껑충껑충 뛸 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 말씀은 좀 난해하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믿음으로 생명을 받은 자는 결코 죽음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 때문에 영생교 같은 이단이 생겼던 것 같다. 아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닌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생명 개념과 우리의 생명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중시하지만 요한복음에 초지일관하는 예수님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예수가 없는 것을 ‘참된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의식에 하나님이 없는 것, 예수가 없는 것은 ‘죽은 생명’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을 가진 자는 마지막 날에 그 몸마저 부활할 것이요, 지금 이 생명을 소유한 자는 가장 소중하고 진정한 것을 얻었기에 더 이상 그에게는 죽음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아는 자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이미 생명을 얻었다, 이미 부활을 소유한 거다. 학자들이 이것을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 한다.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두 단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고 보면 된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종말론은 ‘아직’인데 이걸 신랄하게 비판하고 종말론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다. 다드는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이 아닌 현재적인 것” “종말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기대의 영역으로부터 실현된 경험의 영역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이미’를 강조한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이미,’ 즉 현재적으로 실현된 종말론이 ‘아직,’(요 5:21; 28-29; 6:40, 54; 12:25) 즉 미래적 종말론보다 더 강하게 나타난다.
전통적인 종말론은 임박하기는 했지만 ‘아직,’ 즉 임박한 종말론, 미래 종말론이었다. 언젠가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새로운 몸과 영혼을 입고 살 것, 그래서 종말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 육체적 생명의 개념으로 보면 이 종말론이 더 합리적이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루어진다는 것, ‘이미’를 강조하신 것이다. 바울도 그랬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아직 낡은 세계와 낡은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이미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라 선포한다. 실현된 종말론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거나, 미래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을 이미 얻었다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한다. 천국이 예수를 믿는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 우리가 그리던 종말 세계가 이미 내 안에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육신의 세계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금 부활 생명을 누려야 한다. 예수님은 마르다나 요한복음을 읽는 우리가 이미 영생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강한 확신으로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로마의 칼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롬8:35-39).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바울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허세 같은 이 여유, 이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오나? 단순한 미래 희망? 아니다. 지금 그 안에 주어져 있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나사로의 유족들은 물론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갖기 원하신다. 믿음 안에 놀라운 비밀과 능력이 담겨 있음을 믿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