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14)
일부 잘못된 사람들 때문에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가 소외층과 빈곤층에 대한 섬김을 가장 강조하는 이타적 종교임은 자타가 인정합니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선행과 구제가 마치 기독교의 핵심인양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깊은 의미를 모르는 외부인이 볼 때는 그럴 수 있다지만 간혹 신자들마저 그럽니다.
당연히 모든 신자는 선행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더러 세상에서 빛이 되어 밝히고, 소금으로 부패하지 않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처럼 자신은 죽되 남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두 강령 중의 하나로 이웃 사랑을 들었지만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바탕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웃더러 신자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웃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동료 신자는 물론 불신자도 하나님이 지으신 고귀한 이웃들이기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초대하는 것이 그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서로 힘을 합쳐 함께 잘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자는 일반적 선행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의 순전한 사랑으로 아름답게 섬기는 하나님 나라를 자기 주위에서부터 만들고 확장시켜야 합니다.
거기다 본문은 사랑에는 신자들마저 미처 모르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 중의 일부인데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 앞에서 성도를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한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사랑하면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곰곰이 따져보면 이 진술이 일반적 신앙 이해와 어떻게 다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불쌍하다는 이유로만 사랑하고 그것도 남아도는 것으로 마지못해 합니다. 가끔은 자신을 희생하여 섬기면서 교회로 인도하려 합니다. 어쨌거나 신자로서의 의무로 행하든 진심으로 사랑하든 이웃이 좋아지라고 그럽니다. 그런 사랑으로 인해 내 자신이 거룩해진다는 인식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재림 때에 흠 없게 한다고 해서 선행을 많이 하면 보상을 해주실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의 거룩함에 흠이 없다고 했지, 주님이 상 주신다는 언급은커녕 그런 힌트도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면 거룩함에 흠이 없어진다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성결한 삶이 어떤 계명을 열심히 실천한다고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소극적인 “하지 말라”는 계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또 적극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계명은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먼 장래 일로 제쳐둔 지 오래이지 않습니까? 도덕적 종교적 훈련으로 거룩해진다면 의지가 강할수록 성결에 가까이 다가선 자가 될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마저 아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악은 그 자체를 제거하려 든다고 좀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벗어나려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부라리고 빛을 찾으려 하면 어느 정도 밝아보여도 여전히 어둠 속이며 사실은 어둠에 익숙해진 것에 불과합니다. 밤에 길을 걸을 수 있는 것도 그나마 달빛이 있기 때문인데 그 달마저 태양 빛을 반사한 것뿐입니다. 아주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라도 있어야만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악은 반드시 선으로만 물리쳐야 합니다. 어둠은 빛이 비취기만 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모든 선한 것들 중에 사랑이 가장 강력합니다. 사랑으로 이기지 못할 악은 하나도 없습니다. 채찍이나 형벌보다 사랑이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랑이 악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여럿입니다. 우선 죄의 본질이 사실은 악의 행함 이전에 사랑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자기만 사랑하기로 결단하자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이웃끼리는, 심지어 사랑했던 부부끼리도 서로 헐뜯는 관계로 변질 되었습니다. 죄는 바로 참 사랑의 파괴이기에 죄를 이기고 거룩해지려면 사랑을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 바로 자신을 닮게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성삼위 일체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토록 단 한 치의 악함과 추함도 개입되지 않는 완벽한 사랑으로 서로 맺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사랑이십니다. 당신의 그 완벽한 사랑을 인간에게 나눠주셨으나 인간이 죄로 더럽혔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사실은 그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그런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지만, 그 사랑 자체의 권세로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도 함께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결정적 착각은 이것입니다. 좀 더 거룩해지면 사랑을 더 잘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거룩이 도덕적 종교적 선행이나 정결함으로 정의되어선 안 됩니다. 참 사랑이 없는 어떤 거룩도 소리 나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해야 경건 거룩해지는 것이며 또 바로 그 자체가 거룩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사랑하기엔 여러모로 너무 부족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과 달리 어지간해선 안 된다고 계속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자세히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더러 그런 사랑을 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우리 주 예수께서 ~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흠이 없게 하셔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제일 못하는 일이 바로 참 사랑입니다. 겉모습으로는 선행에 상당한 열심을 낼 수 있지만 진짜 온전한 사랑의 바탕에서 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다른 모든 죄를 먼저 없애야만 사랑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죄악과 사랑을 전혀 상관없는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사랑의 실종이 바로 죄입니다. 단지 우리 영혼이 죄에 너무 많이 찌들어 있기에, 다른 말로 참 사랑을 하지 않았고 또 못했기에 스스로 하기는 힘든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도움과 인도를 받아야 다시 참 사랑을 회복할 수 있고 또 비로소 참 거룩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011/7/28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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