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 속에 갇히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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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양기성 목사 ©한국교회문제연구소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는 인간은 어느 누구나 궁극적으로 그 내면에 종교적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종교에 대해 일반적인 지식이나 관심보다 더 뛰어 넘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아예 신에 대하여 신의 모든 것, 그 일체를 규명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를 포함하든, “신은 죽었다”라든가,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신이다”와 같은 결론적 주장을 하는 것들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는 신(하나님)은 인간의 부속물이 되어 판단받는 존재라는 것으로서, 주객이 전도된 상황임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창조, 즉 지음을 받은 존재, 특히 죄로 말미암아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성(Omnipotence), 전지성(Omniscience), 무소부재(Omnipresence)는 말할 것도 없고 영원한 존재(Infinite Being) 됨의 성격과 가치를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과 같은 입장에서 부정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즉, 한계적 존재(Finite Being)가 무한성의 존재(Infinite Being)를 평가하는 모순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유신진화론도 말 그대로 “진화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 또는 “지금도 창조적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순서와 절차적 과정을 인간들이 그 한계적 상태 속에서 창조의 성격, 과정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진화론은 신앙 없는 자들의 과학, 생물학적 주장의 논리일 뿐이다. 그들의 연구는 사실, 온전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불완전한 한계성을 가진 인간이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 인간 시초도 흔히 화학 요소인 탄소연구를 통해 시간과 연대를 측정한다 하는데, 그 추측마저 다 제 각각이고 다르다. 어떤 학자는 3만 5천년 전이라 하기도 하고, 수 십만년 전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더 멀리 몇 억년 전이라 하기도 하고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지금의 유신진화론자들처럼 진화논리를 주장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는 피에르 타일라드 샤딘(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다. 그는 프랑스 예수교단 신부로서 인간의 진화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우주 형성과정을 1) 조직형성의 시기 2) 수소권 형성 3) 대기권 형성 4) 생물권 형성 5) 인간 정신계(Noosphere)로 나누었고, 인간 시초에 대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탄소”를 연구지침의 근본자료로 삼는 것처럼, 어떤 “미립자(Particulate matter)”를 인간형성의 시초로 보았다. 그 미립자가 원자로, 원자가 분자로, 분자가 세포로 그 세포가 다양한 조직체를 이루었는데, 인간도 그 현상 가운데서 조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광물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인간 시초를 연구하기 위해 내몽고를 수차례 방문, 인간두개골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하부논리에는 재생, 번식, 분열, 개혁, 변화, 연합같은 반(反) 고정 조건들이 나타나 있다. 말 그대로 하부 조건적 상태와 현상들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이와 같은 조건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진화론, 또는 유신진화론은 창조 그 자체를 진화와 진화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므로 기독교적 창조와는 다른 모양의 말을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결국, 샤딘은 교단으로부터 축출되었는데, 그는 “진화를 입증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오히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하고 거룩한 영적 현상이 나 자신을 무겁게 압도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나는 기독교세계관 마음으로 살고 있다(I am living heart of the Christian world)”라 고백했다. 연구 말년에 창조론에 두 손을 든 것 같은 말을 한 것이다 .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나타난다. 진화론 과학주의자들이나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육신의 눈이 보는 것처럼 보려하고 있고(도마처럼), 자신들의 지식 안에 가두려 하는 잘못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본 것처럼 주장하고 단언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면 그는 신이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모르니까 인간이 아니겠는가. 소크라테스처럼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안다” 했는데, 그런 진실한 고백이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편, 일부에 의해 진화론이나, 유신진화론 주장이 나타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창조와 연관하여 소위 축자적 성경해석 성향에 대한 맞대응 현상 때문일 수도 있다. 진화론, 또는 유신진화론자들은 인간 역사를 5천년, 6천년, 24시간을 하루로 보는 해석에 대해 비하성 비판의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말씀 뒤에 근거하고 있는 뜻, 의미, 세계관들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 요구에 따라 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게 6일, 5천년, 6천년을 고정시켜놓고 직설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역시 유신진화론자들의 무리한 주장과 반대적 입장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증명을 요구하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이성적 유연성에 유념해야 할 일이다.

어쨋든, 어느 누구나 신학을 함에 있어서, 특히 온건하고,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도서 5:2-3을 들을 필요가 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 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아는체 하는 인간의 소리를 너무 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하나님의 경지를 넘어가려 너무 아는체 말하는 자들에 대한 고대 지혜자의 충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진화론 속에 가두려 하지만 결코 하나님은 진화론 속에 갇히실 분이 아님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다.

“you know that yourself”( 소크라테스 )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