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은 WCC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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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대회, 복음의 우선성·긴급성 선명하게 선언해주길”

1. 로잔의 탄생 배경과 WCC와의 관계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로잔운동은 왜 탄생되었는가? 그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WCC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나치게 사회구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1952년에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태동되면서 WCC는 선교를 ‘복음 전도 운동’이 아닌 평화운동, 인권운동, 정의운동, 환경운동 등의 ‘세계 잘 살게 만들기 운동’으로 바꾸었고, 1968년 제4차 웁살라 총회에서는 선교의 목표를 ‘복음화’에서 ‘인간화’로 바꾸었고, 1973년 방콕 CWME 대회에서는 선교에서 전해지는 구원의 내용을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바꾼 것에 대한 위기의식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WCC에 의해서 선교가 복음운동이 아닌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보고자 출발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약 50여 년의 세월 동안 로잔은 WCC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선교의 여정을 걸어왔다. 양 진영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어느 한쪽 진영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양 진영 모두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두 운동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그 결과로 양 진영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유사한 관점을 지니게 된 측면이 있다. 즉 WCC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WCC의 잘못된 방향을 막기 위해 태동되었던 로잔운동이 오늘날은 어떤 면에서는 WCC와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다. 이 글은 로잔운동이 태동 당시 지녔던 비전인 세계 복음화의 사명에 충실한 운동이 되기 위하여 붙잡아야 할 바를 제시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먼저 WCC가 지닌 선교신학적 특징들을 분석하고, 로잔이 WCC와 다른 길을 가면서 로잔만이 가진 독특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고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2. WCC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에 나타난 주된 경향

로잔이 WCC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WCC 신학의 주된 특징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 로잔과 WCC의 신학의 관계성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워낙 방대하기에 그 특징을 간단히 정리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신학과 비교해 보면 에큐메니칼 신학만의 특징을 비교적 쉽게 찾아낼 수 있으며,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전통적인 선교 신학에서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멸망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기초로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세상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면서 샬롬을 실현해 가시는 장이다. 즉 세상은 더 이상 부정적이고 멸망할 세상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샬롬이 실현되는 긍정적 대상으로 인식되게 된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며, 교회는 세상의 샬롬을 위한 여러 기구들 중 하나의 위치로 전락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교회-세상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세상-교회의 순서로 이루어지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이 중심이 되고 교회는 여러 기구 중 하나인 부차적인 기구로 인식되게 된다.

둘째, 선교 대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는 주로 구원을 전하는 사역으로 이해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선교의 주된 대상은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 즉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선교가 출현하면서 선교의 대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넘어 매우 폭 넓은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출현과 더불어 에큐메니칼 선교는 하나님이 선교의 주역이심을 인식하고, 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구령 사역만이 아니라 세상의 혁명운동, 민권운동, 평화운동, 창조질서회복 운동, 교육개혁 운동 등의 활동들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샬롬을 구현해 가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 위에서 선교의 대상은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로 좁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피조물로 이해된다. 이상과 같이 선교의 대상이 폭넓게 이해되면서 선교사역의 성격도 복음전도 위주의 사역에서 가난한 자와 억눌리고 소외된 자의 샬롬을 위한 사역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의 회복과 보존을 위한 사역으로 변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셋째, 전도와 봉사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전통적인 선교에서는 선교의 목표를 모든 민족의 제자화에 두었기에 복음전도가 핵심적인 사역이고 사회봉사는 부차적인 사역으로 인식되어왔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전도와 이웃사랑이 모두 사명이지만, 선교의 사명을 말할 때는 복음전도가 핵심적인 사명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세상이 교회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고,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를 평화로운 곳 샬롬이 충만한 곳으로 만드시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기에, 사회봉사와 이웃사랑 등의 사회적 책임은 더 이상 선교적 사명보다 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교적 사명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거나 동등한 사명으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에큐메니칼 선교는 1910년에 처음 시작할 때 사도적 헌신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지만 1950년 이후로 세계에 대한 봉사로 그 초점이 바뀌었고 그 후 통전적 선교를 말하면서 두 과제가 동일한 과제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넷째, 핵심사역에 대한 관점이다. 전통적인 선교 역시 사회봉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책임에 매우 열심이었다. 학교사역, 병원사역, 고아원사역, 각종 복지 사역 등 매우 다양한 봉사사역을 수행하였고, 일의 양으로만 보면 사회봉사를 더 많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순서에 있어서도 항상 복음 전도만을 먼저 한 것은 아니었다. 상황을 따라서 먼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여건이 형성될 때 복음 전도를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선교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영혼구원으로 정하였고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복음의 전파가 필수적인 사안이었으므로 복음전도가 늘 핵심 사역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즉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봉사를 열심히 감당했지만 사회적 책임은 여전히 핵심사역을 위한 부차적인 사역 혹은 복음 전도를 위한 다리로서의 사역으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진영의 경우는 처음에 복음화가 아닌 인간화가 선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다가 1975년 나이로비 대회 때부터 양쪽을 다 강조하는 선교신학 소위 말하는 ‘통전적 선교신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복음화와 인간화가 동일하게 중요하고,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이 동일하게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시작하였다. 즉 에큐메니칼 신학은 선교에 있어서 핵심 사역을 거부하고 그 결과로 선교에 있어서 핵심사역이 현저하게 약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섯째, 전도의 긴급성과 우선성에 대한 관점이다. 전통적인 선교에서는 복음전도의 과제를 매우 긴급한 것으로 여기면서 가장 큰 헌신을 드려야 할 과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이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이들을 구하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긴급한 일이며, 이 일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아깝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이러한 긴박감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세상 이해는 주님의 임박한 재림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되는 세상 이해이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이루어지는 세상 이해의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세상 이해 속에서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야 하는 긴박감보다는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일로 보일 수 있다. 당연히 바람직한 선교의 방향은 복음 전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갈등의 소지를 늘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보다는 세상의 평화, 화해, 일치, 창조질서 보존 등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가 더 바람직한 선교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3. 로잔이 WCC와의 차별성을 지닌 운동이 되기 위하여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던 제3차 로잔대회 ©lausannemovement

앞에서 WCC 선교신학이 지닌 특징들을 분석해보았다. 앞서 분석한 에큐메니칼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에큐메니칼 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에 비해 선교의 폭이 매우 넓고 세계 친화적이며 기본적으로 ‘세계 잘 살게 만들기’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하여 로잔운동은 여전히 ‘세계 복음화’를 핵심적인 목표로 삼는 운동이고 세계 복음화를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하기에 로잔은 WCC와 분명히 결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 글의 제목에서와 같이 “로잔은 WCC와 다르다!”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로잔이 WCC와 분명하게 다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다소의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로잔은 WCC와 다르다!”라는 표현 뒤에 물음표(?)를 첨가하였다. 특별히 3차 케이프타운 대회 이후로 로잔은 복음의 우선성에 대해서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면서 총체성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즉 복음의 우선성 대신 총체성을 강조하면서 선교에 있어서의 핵심사역 그리고 복음 전도의 긴급성 등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복음의 우선성과 긴급성 등에 대한 기준선이 흐려지면 그것은 결국 WCC의 통전적 선교와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즉 복음의 우선성과 긴급성은 WCC와 로잔을 구분하는 최소한의 핵심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장치가 제거되는 순간 땜이 무너질 때 양쪽의 물이 합해지고 물난리가 나듯이 로잔은 WCC와의 차별성을 상실하고 WCC의 길을 따라가게 되고, 결국 선교는 복음운동이 아닌 ‘세상 잘 살게 만들기 운동’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WCC가 보여주듯이 장기적으로 복음전도와 교회의 쇠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4차 대회에서 로잔이 모든 것을 다 자유롭게 다루더라도 복음의 우선성과 긴급성에 관해서는 다시 한번 선명하게 선언해주기를 기대해본다.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Rethinking the Theology of WCC』,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선교 주제 28가지』, 『현대 선교학 개론』(공저), 『한 권으로 읽는 세계 선교 역사 100장면』, 『성장하는 이슬람 약화되는 기독교』, 『현대 선교신학』, 『현대 선교의 핵심 주제 8가지』, 『현대 선교의 프레임』, 『제4 선교신학』, 『성경이 말씀하는 선교』, 『현대 선교신학(개정판)』, 『현대 선교의 목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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